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전문가
- 연도2021년
- 수상동상
- 이름오수진
- 소속군산의료원 호흡기내과
내 진료실에는 창문이 없다.
아침에 출근해서 진료에 몰두하다보면 해가 떴는지 비가 오는지, 또
바람이 부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어느덧 퇴근시간이 되어 병원 밖으로 나가보면 분명 쨍쨍했던 하늘이
어두컴컴한 먹구름으로 변해 있을 때도 더러 있다. 덥지도 또 춥지도 않은 내 진료실에서는 덥다며 땀을
뻘뻘 흘리고 들어오는 환자의 푸념섞인 목소리나 한구석에 놓여 있는 젖은 우산 따위로 바깥 날씨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료가 시작되면 두평 남짓한 이 답답한 공간에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뜬다.
빨간색이었다가 노란색이 되고 초록색이었다가 검정색도 된다. 갑자기 눈보라가 쳤다가 비도
내리고 더러는 햇빛이 쨍 하게 내리쬐기도 한다.
“과장님이 전문가시고 잘 아실 테니까 알아서 잘 처방해주세요.”
“약 먹어도 하나도 낫질 않아요. 왜그렇죠? 검사 결과 다시 설명해주세요.”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시간 넘게 기다렸어요, 참 전문가 한번 만나기 힘드네요.”
전문가. 나는 내 진료실에서 이렇게 불린다. 의학공부를 오래 해왔으니 의사라는 타이틀도 생겼고 나름 번듯한 면허증도 있다.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의학용어들을 쓰면서 내가 배운 지식으로 진찰하고 검사도 하며 각종 약들을 처방해준다. 이 공간에서의 나는 그렇다. 의학 전문가이다.
“엄마 밥이 맛 없어요.”
“방금 은행 도착했어요, 무슨 서류작성을 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우선 적어서 가볼게요.”
“여보세요, 서비스센터죠? 냉장고에서
자꾸 소리가 나고 작동을 안해요. 얼른 와주세요.”
퇴근을 하면 나는 다시 문을 열고 두평 밖의 바깥 세상으로 나간다. 흰색
가운을 벗은 또다른 나는 여러 가지 일에 참 서툰 사람이다. 아이를 처음 낳고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몰랐다. 운전은 할수록 어렵고, 음식을 해도 영 맛이 없다. 머리가 덮수룩하게 길었는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잘 쓰던
컴퓨터가 고장나면 머리가 하얘진다. 나는 다시 아마추어가 되고 이 문제들을 해결해줄 전문가를 찾아 나선다.
아침 저녁으로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문턱. 퇴근길 번화가
대로변에는 북적거리며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형형색색 가지각각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생선가게, 맛있는 식당. 미용실
그리고 옷가게. 고개를 돌리면 컴퓨터 수리점, 예쁜 마카롱
가게, 핸드폰 판매점도 있다.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나의 전문가들에게 간다. 그들이 내가 못하는 것들을 해결해줄
것이다.
“배타실 때 찬바람 많이 쐬시면 콧물도 더 나오시고 기침도 심해지실 수 있어요.
조심하세요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좀 쉬시면 어떠세요?”
“과장님, 제가 배탄지 40년이
넘어가요. 제 생업인데 쉬면 되겠습니까? 저 없으면 조업
나가지도 못해요. 약 잘 지어주시면 열심히 물고기 잡다가 또 오겠습니다.”
퇴근길 잘 차려진 저녁밥상. 잘 구워진 노릇한 생선을 보면서 진료실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배 한번 제대로 타보지 못한 내가 이렇게 맛있는 생선을 먹을 수 있는 것은
고생한 그분들 덕분이리라. 잘 만들어진 뚝배기와 숟가락, 예쁜
접시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맛있는 쌀밥과 고깃국 김치들까지. 나
아닌 다른 이가 고생해 세상에 내어놓은 것들을 오늘도 감사하게 소비한다.
그리고 다시 나의 진료실.
진료가 시작되면 많은 분들이 나를 만나러 온다.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나가던 사람들이 어딘가 불편해지고 아프면 이곳 병원으로 와 의학 전문가인 “나”를 찾는다. 면면을 보아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 분들도 모두 어느 분야에서는
전문가임에 틀림이 없다. 거창한 타이틀이나 면허증이 아니더라도 본인이게 주어진 “업”을 열심히 해나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덕분에 이시간 여기, 내가 있을 수 있고 그분들이 또한 이곳에
있다.
내가 나의 일을 하면서 사는 것. 그런 하나하나의 “업”들이 모여 세상이 이루어지고 불편함 없이 어우러져 살아나간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인생사에 나에게 입혀진 이 “업”을 잘 찾고 기쁘게 해나가는 것이 또 하나의 진리가 아닐런지. 그러므로
오늘의 나도 나의 “의업”을 다하기 위해 또한번 노력하기로
다짐한다. 세상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고 또 나의 “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다양한 인생사. 우리는 누구나 전문가이다.
- 다음글그해 5월, 박창균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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