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굶고 비우고 행복하기
- 연도2010년
- 수상동상
- 이름박응순
- 소속중구보건소 의약과
삼 년 전 여름에 안면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결혼하고 11년 동안 산과 계곡으로만 피서를 다녔으니 바다 여행은 오랜만이다. 애들도 뒤를 쫓아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커서 바닷가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산을 오르지도 않고 애들 뒤치다꺼리도 안 하니 정말로 한가했다. 바닷가를 산책하고 많은 생각을 하며 휴가를 보냈다.
나는 바닷가에 앉아 사람들이 노는 모습을 보다가 공통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물가로 나와서 처음에는 여러 가지 놀이를 한다. 산책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공놀이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사람은 놀이 대신에 조개를 잡든지 물고기를 잡든지 모래성을 쌓는다. 모래성 안에 작은 물고기나 게를 잡아넣기도 한다. 처음부터 조개나 물고기를 잡든지 모래성을 쌓는 사람도 많다. 어른이나 아이나 똑같다.
조개 잡기와 물고기 잡기, 모래성 쌓기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다가 ‘이것이 인간 본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움켜줘야 하고 쌓아야 하고.
그날 나는 늦도록 바닷가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움켜쥐고 쌓으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언제나 더 움켜쥐고 더 쌓으려고 애를 썼다. 많이 움켜쥔 사람이 부러웠다. 많이 쌓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목표였다. 나에게 다른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잘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반드시 남보다 잘해야 했다. 시험 성적에 따라 웃고 울었다.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부러웠고, 공부를 못하는 친구를 업신여겼다.
나는 고등학생일 때 공부를 잘했다. 부러운 사람보다 업신여길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대학에 오니 상황이 달랐다. 의과 대학에는 뛰어난 친구가 아주 많았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성적이 시원치 않았다. 나는 대학 시절 대부분을 열등감 속에서 보내야 했다.
사회에 나와서는 돈이 목표였다. 부자가 되고 싶었다. 머릿속은 온통 한 푼이라도 더 벌 생각으로 가득 찼다. 책을 읽어도 재테크 서적만 읽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움켜쥐는 능력도 쌓는 능력도 없었다. 욕심만 많았다. 주식도 하고 투자도 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대학 친구와 비교하니 사회에서는 등수가 오히려 더 떨어졌다. 실망스러운 결과는 나를 자신에 대한 불만과 패배감으로 몰아넣었다.
생각해 보니 움켜쥐고 쌓는 일에는 만족이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영원히 채울 수 없다. 하지만, 인간 본능은 끝없이 움켜쥐고 쌓기를 요구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날 밤 안면도 바닷가에서 나는 ‘만족해야 행복한데, 인간 본능은 행복과 정반대로 가게끔 만들어졌구나.’라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행복하기 어렵게 설계되었다. 우리가 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반대로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다. 적은 사람만이 움켜쥐고 쌓으려는 본능을 끊고 행복을 얻는다.
안면도 바닷가에서 얻었던 깨달음이 나를 바꾸지는 못했다. 생각 한 번으로 사람이 바뀌면 세상은 온통 깨달은 사람으로 넘칠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휴가에서 돌아오자 나는 안면도 바닷가를 까맣게 잊었다. 예전처럼 움켜쥐고 쌓으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40대가 되자 내 몸에도 늙는 증거들이 속속 얼굴을 내밀었다. 몸무게가 늘고 배가 나왔다. 20대와 비교하면 몸무게가 30킬로그램이나 늘었다. 혈압도 올랐다. 혈압약을 먹을지 결정해야 했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고 지방간도 생겼다. 대학생 때부터 계속되던 소화불량은 조금 더 심해졌다. 원인을 모르는 두통도 나를 괴롭혔다.
환자들에게는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체중을 줄이라고 말했지만 스스로는 지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선생님이 나에게 절식을 권했다. 소식과 절식은 다르다. 소식은 세 끼를 조금씩 먹는 것이고 절식은 끼니를 거르는 것이다. 세 끼 식사 중에 한두 끼만 먹는다. 절식이라고 전혀 안 먹는 것은 아니다. 위를 깨우지 않으면 물이나 음식물을 조금 먹어도 괜찮다. 그 선생님은 자기도 효험을 보았다며 경험을 말해 주었다.
처음에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그때까지 굶은 적이 없다. 굶기는커녕 밥시간이 한 시간만 늦어도 참기 어려웠다. 절식을 권한 선생님은 적응하려면 삼 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힘들어도 잘 참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새로운 일을 하려면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 대부분은 쉽게 풀린다. 절식도 같았다. 나는 삼 개월이 아니라 사흘 만에 완전히 적응했다. 절식하고 첫 이틀 동안은 배가 고프고 기운도 없었다. 그러나 삼 일째부터는 배도 안 고프고 힘이 났다. 절식을 권한 선생님은 나중에 내 이야기를 듣고 웃으면서 “박 선생은 절식 체질이네.”라고 말했다.
절식과 운동을 하며 육 개월을 보내자 건강이 좋아졌다. 몸무게가 20킬로그램이나 줄었다. 몸무게가 줄자 콜레스테롤 수치도 내려가고 지방간도 없어졌다. 혈압도 정상이 되었다. 속도 편안해졌고 두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밥을 먹는 시간도 즐거웠다. 세 끼를 먹을 때는 습관처럼 밥을 먹었다. 하지만, 끼니를 거르니 식사 시간이 그리웠고 소중했으며 즐거웠다. 기계처럼 하던 일이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사람은 경험의 동물이다. 백 번을 들어도 한 번 해본 것보다 못하다. 나는 절식으로 건강을 찾으며 움켜쥐고 쌓기보다 버리고 비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보고 안 것이 아니다. 몸으로 깨달았다. 몸을 움직였던 이치가 정신에도 작용할 것 같았다. 안면도 바닷가에서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생각해볼수록 나는 많이 가졌다. 부부 금실도 좋고 아이들도 건강하고 작지만 집도 있고 안정된 직장도 있다. 퇴직하면 연금도 나온다. 이 정도면 더 움켜쥐거나 쌓지 않아도 된다. 죽을 때 갖고 가지 못하니까.
나는 절식 경험이 있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비우고 버려야 편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내 직업은 보건소 의약과장이다. 의사라도 공무원이니 보수가 적다. 창피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고 보니 소중한 일이다. 매달 월급이 통장에 정확히 들어오니 돈 걱정이 없다. 공무원은 청렴 의무가 있고 부업도 못하니 욕심이 차지할 공간이 작다. 비우고 버리기에 딱 맞는 직업이다.
생활도 변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고민하던 시간을 다른 것으로 채웠다. 이제는 ‘제대로 살기’나 ‘가족과 이웃에게 잘하기’가 관심거리다. 많이 쌓은 친구보다 봉사하는 친구가 부럽다. 입양도 하고 싶다. 특별한 노력을 안 해도 매일 가난한 사람을 만나고 개업한 선생님을 돕는 보건소 의약과장이란 직업도 고맙다. 이것이 행복인가 보다.
- 다음글나에게 쓰는 처방전
- 이전글이전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