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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접종

  • 연도2018년
  • 수상대상
  • 이름김대현
  • 소속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초등학교 때였다. 수업시간에 노크소리가 들리고 이내 교실 앞문이 열리며 양호선생님과 간호사들이 들이닥쳤다. 예방접종이었다. 우리들은 무서워서 술렁이며 소란을 떨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교실 앞뒤로 긴 줄을 만들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러면 으레 누군가는 맨 앞에 서게 되었고 모두가 맨 앞의 그 아이를  딱하게 쳐다보았었다. 맨 먼저 맞게 되었다고 그 아이를 놀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 예방접종 줄에서도 선후가 생기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앞에 사람을 바라봤던 것이다. 나도 내가 그 아이가 아닌 것에 잠시 안도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 아이를 놀리던 친구도 또 나도 곧바로 주사를 맞았다. 모두가 맞았으니까. 그런 와중에서도 그 아이를 위로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말이 똑똑히 기억난다.


"걱정하지마 나도 곧 맞을거야"


그래. 누구나 예외는 아니었다. 서로 뒤로 가려 엎치락뒤치락 했지만 주사를 맞지 않은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단지 먼저와 나중만 있을 뿐... 무표정한 간호사는 우리들의 어깨에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라'라는 딱지를 붙이듯 주사바늘을 찔렀었다.


‘나도 좀 있으면 맞을거야’


그 친구가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을까. 어쩌면 스스로를 달래는 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두가 똑같이 겪어야한다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돌아보면 어렴풋이 그게 어떤 위로를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모두가 똑같다는 것. 단지 지금과 나중의 차이일 뿐 똑같다는 것.


그때는 주사가 가장 무서웠지만 주사가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지금. 불시에 문을 열고 들어닥칠까 두려운 것은 ‘죽음’이다.


은혜병동은 호스피스병동이다. 내 환자가 이 병동으로 입원했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어제보다 더 추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은혜병동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 속에는 싸늘한 조용함이 있었다. 회복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어서일까. 병동으로 가는 문이 열리면 복도는 몇 걸음마다 가지를 치듯 하나씩 방을 내고 있었고 그 방들마다 여러 가지 사연과 바쁜 일들이 숨어있었다. 죽음 앞에 정리해야 할 일,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상, 풀리지 않은 앙금을 녹이는 것까지, 병실안 하나의 침대는 삶이라는 일을 마무리하는 작업대 같았다. 지그시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은 아직 맘껏 보지 못한 것을 담아두려는 듯 내려오는 눈꺼풀을 들어올리느라 힘겨워 보였다. 아내를 옆에 두고 누운 환자는 해줄 이야기가 너무 많아 오히려 말을 시작하기가 어려운 듯 침묵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숨이었고 고통은 비밀이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말하기도 힘들어 한 마디 말을 숨처럼 불어내고 있었다. 환자는 말을 하거나 숨을 쉬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그리고 어디를 봐도 편하지 않는 모습인데도 고통이 부끄러운 듯 숨기고 오히려 주위의 수고를 걱정하고 있었다. 고통은 몸 안에 간직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숨겨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통증이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은 분명 고통스러웠다. 삶이 끝나는 순간이 죽음인데 그들은 삶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죽음을 불러와 치르고 있었다.


담담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와 담담하게 그들을 대하는 의료진 사이에는 서로 약속한 것처럼 숨겨둔 감정과 이야기가 있다. 어느 누구도 선뜻 그것을 집어들어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의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건강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만 소외되어 죽어간다는 사실에 무엇이 위로가 될까? 언젠가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이 과연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럴거라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하고 돌봐야하는 이유는 되지 않을까?


나는 한 환자를 보고 그 환자의 죽음이 아닌 나의 죽음을 생각했었다. 내 환자는 10년 전부터 내 외래를 가끔 들르던 남자 환자였다. 동맥이 막혀 양쪽 다리를 번갈아 수술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폐암이 진행되어 몇 개월 남지 않은 시간을 싸들고 병원을 찾아왔었다. 종착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온 것처럼...


입원한 다음날 그 부부의 대화가 기억난다. 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 먼저가요. 난 좀 더 살면서 친구들 하고 놀다가 갈께요"


"그래..."


"그런데 언제 나 데리러 올거예요?”


"당신은 아직 멀었어. 한참 있다가..."


죽음을 마치 소풍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부부에게 죽음은 누군가 잠시 먼저 가서 기다리는 지점이었다.


몇 일뒤 회진하러갔을 때 환자는 혼자 1인실을 지키고 있었다. 환자는 대뜸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선생님... 어느 정도 살겠어요?”


그에게도 죽음으로 가는 소풍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절망 속에서 물었지만 희망없이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뭐가 솔직한 것일까? 어쩌면 그 환자도, 의사인 나도 솔직한 것은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짧은 시간동안 절망과 희망을 반반씩 가진 말을 찾아냈다. “아주 오래 남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떻게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모호함이 의사의 능력이 되어버렸다. 


그 환자 또한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잡으며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환자는 주위 사람들에게 부담주기 싫어 통증을 숨기려고 했지만 누가 봐도 아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통증을 참는 환자를 설득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주위 사람들한테 부담 준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누구나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저도요...”


평소 가볍게 했던 말인데 갑자기 그 말에 무게가 느껴졌다.


"그러니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픈 사람 보살펴주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아프면 참지 말고 아프다고 하세요"  


하지만 위로랍시고 해버린 말이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내가 그가 아닌걸, 내가 그 죽을병을 앓고 있지 않은 걸. 그것을 다행으로 느끼며 서 있었던 걸까? 그래서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위로할 수 있었던 걸까? 풍족함을 나눠주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 또한 착각일 것이다. 나도 언젠가 그 자리에 눕게 될 테니 말이다.


환자의 시간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손을 허공에다 휘젓고 통증에 소리 지르고, 섬망과 고통.  죽어가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죽음은 위로받을 수 있는 것도,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죽음은 섬망이고, 통증이고, 두려움이었다. 그 섬망이, 통증이, 두려움이 없어질 때가 되면 아마 우리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새벽. 환자는 삶을 끝내면서 자신의 고통과 가족들의 고통을 모두 거둬갔다. 약하다는 인간의 그 약한 모습을 다 내어보이는 과정이 죽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괴롭고 힘든 과정을 끝내줄 것 또한 죽음밖에 없지 않은가?  


문이 열리고 불시에 찾아오는 죽음. 어린 시절 모두가 다 맞을 수밖에 없었던 예방주사 앞에서, 서로 놀리고, 위로하고, 공감했던 우리들처럼, 그리고 너무나 무서워했던 우리들처럼, 지금 죽음 앞에 서 있는 우리는 똑같이 위로하고, 보살피고 또 무서워하고 있다. 그 줄에는 건강도 생활의 윤택함도 없다. 단지 순서만 있을 뿐이다. 누구나 그 줄 맨 끝으로 가려고 발버둥 치겠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 그 줄 맨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 부부에게 죽음과 삶은 먼저 가는 사람과 나중에 갈 사람이었다.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는 줄에 서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은 맨 앞에 또 다른 사람은 저 뒤에 서 있는 기다란 줄.  


하지만 누군가가 죽어갈 때 누군가는 살아있을 테니 - 우리의 고귀한 이타심이 아니라, 거창한 연민이 아니라 - 단지 나는 살아있고 그는 죽어가기에 우리는 앞에 사람을 돌봐야 한다. 길게 늘어선 줄의 뒤에 사람이 앞에 사람을 생각하듯이 단지 내 앞에 누가 서 있기 때문에 말이다.


나도 언젠가는 그 줄 맨 앞에 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는 내 앞에 누군가 서 있을 것이고 나도 그를 돌봐야 한다. 의사라서가 아니라 줄을 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이라는, 하지만 면역도 갖지 못하는, 그 예방접종 대기줄에 어디쯤 서 있을까?


몇 개월이 지난 후 사별가족 모임에 환자의 아내 분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차 들렸었다. 날 보자말자 달려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으셨다. 아마 나를 보니 남편 생각이, 남편이 죽어가던 과정이 그리고 자신의 고생이 한꺼번에  생각났을 것이다.


"고마웠어요. 따로 인사도 못 했네요" 조카뻘되는 내게 깍듯하게 인사하시고는 "내가 아플 때도 선생님이 봐 주실거죠?"


아마 그 '아픔'은 죽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를 보고나니 남편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죽음도 갑자기 떠올랐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 자신도 죽음에 이르면 그렇게 돌봐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순서를 생각하신 모양이다.


갑작스런 물음에 대답했다.


"아프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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