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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황홀한 고백

  • 연도2005년
  • 수상장려상
  • 이름허원주 교수
  • 소속동아의대 방사선종양학과

호기심

대여섯 살 때쯤이던가. 나는 엄마가 경영하는 동네 약국집 큰 아들이었다. 그때는 약국에서 엉덩이 주사 정도는 별 문제없이 놓아주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집안 여기저기엔 깨지거나 금이 간 유리주사기들이 널려져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채 온전한 주사기만 골라 팔팔 끓는 물에 딸그락거리며 소독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눈에도 제법 인상적이었다.
김이 나는 뜨거운 주사기에 익숙한 솜씨로 증류수와 흰 가루약을 섞어 채우면 아무리 허우대 멀쩡한 어른들도 겁에 질린 얼굴로 꼼짝없이 어머니 앞에 큼직한 엉덩이를 벗어 내리곤 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주사를 놓기 전 예비동작으로 엉덩이의 한쪽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던 어머니의 왼손과 주사를 놓던 오른손의 절묘한 타이밍이다. 그 완벽한 박자에 주사 맞던 이들도 언제 주사바늘이 엉덩이를 뚫었는지 모른 채 예상보다 덜한 통증에 안도의 표정으로 어머니께 몇 번씩이나 고맙다고 말하며 옷을 추스리곤 했다.
어른들의 그런 표정 변화를 보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 주사기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구나’하는 뭐, 그런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의사가 된지도 모르겠고….
한번은 같은 동네 사는 얼굴이 유난히 희고 참 곱상하게 생긴 여자애가 자기 엄마 손에 끌려 우리 약국에 주사를 맞으러 왔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사코 그 애의 주사 놓는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 나이 특유의 넘치는 호기심과 악동 끼를 발휘, 멀찌감치 숨어서 내 또래 계집애의 앙증맞은 엉덩이를 기어이 감상했다. 그 여자애가 폐병(결핵)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몇 년 뒤 유명을 달리했다는 일은 철이 들고도 한참 뒤에 듣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 뒤로도 집에 굴러다니던 깨진 주사기들을 수집해 동네 애들과 함께 병원놀이를 한답시고 여자애들의 엉덩이를 합법적으로 실컷 보았던 일, 약국집 큰 아들의 주사기 놀이가 온 동네 소문이 나 어머니께 혹독한 야단을 맞았던 일들이 지금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2학년 때까지 일주일에 한번쯤 엄마 손에 이끌려 여탕엘 가곤 했다. 개구쟁이 아들의 일주일 묵은 때를 당신께서 직접 말끔히 벗겨내야 직성이 풀리는 그야말로 완벽주의자 엄마를 둔 덕택에 지금 나이에는 돈 주고도 못할 구경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흐릿한 실루엣 정도로 밖에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 아마도 어른 여성의 알몸을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무엇보다도 여탕 안에서 겪었던 힘든 기억이 즐거울 수 있는 환상을 모두 앗아가 버렸던 것 같다. 그저 때가 잘 불릴 때까지 뜨거운 물에 한참을 들어가 있어야 했던 고통스런 기억, 어린애 피부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열탕의 온도에 인내의 한계를 시험당하며 엄마의 O.K.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절박했던 악몽의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죽기보다 싫었던 고통과 고문의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살갗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밀리는 아들 몸의 때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던 엄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던가. 지금이야 누가 여탕에서 열심히 때를 벗겨 주겠다면 마다할 일이 아니지만 그때는 누구든지 이 상황에서 구제해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드디어, 필연적으로 그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목욕탕에서 여자 담임선생님을 바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아무리 코흘리게 제자지만 남자아이 앞에 알몸을 보이게 된 처녀 선생님…. “선생님, 안녕하세요?”하는 인사에 질겁하며 당황해 하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어린 제자와 학부형을 보던 선생님, 이윽고 정겹게 인사하는 엄마를 목욕탕 구석으로 모시고 가 심각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그 선생님의 물기 젖은 긴 머리와 분홍빛 알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탕 구경을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혼자 남탕에 갔다 온 날은 어김없이 온몸을 검사 당하고 제대로 밀지 않은 때가 남아 있을라치면 가차없이 혼쭐이 났다.


사춘기 지금 생각하면 또래의 애들보다 훨씬 일찍 사춘기를 맞이한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부터 신체의 이상징후가 발현되었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 싫어 혼자 화장실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같으면 다른 애들보다 빨리 어른이 되었다고 자랑할 일을 그때는 나 혼자만 각별히 큰 형벌을 받고 있다는 곤혹스러운 느낌이었다. 정신은 아직 미숙한 채, 신체는 도도히 흐르며 압박해 오는 남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충동과 때로는 터질 듯이, 때로는 도통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이 스물거리는 간지러움으로 많이 힘들어 했었다. 요즘처럼 성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시절이었고 집안의 장남이라 의논할 형도 없었기에 그저 세월이 지나기만 기다릴 형편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 이런 일들이 최소한 혼자만의 고민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발산할 곳 없는 숫기는 악동들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장난질로 발전하였다.
미니 스커트가 유행하던 시절, 우리는 하교길에 꼭 버스 뒷좌석을 차지해 육교 위로 보이는 누나들의 늘씬한 각선미를 향해 구부린 클립을 고무밴드에 걸쳐 새총처럼 쏘아대곤 했다. 간혹 운 좋게 허벅지 깊숙이 총알이 명중되고 화들짝 놀라 절뚝거리는 아가씨들을 보면 묘한 쾌감과 전율에 낄낄대곤 했다. 수업시간에도 의기투합,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선생님의 수업 중에는 작은 손거울을 준비해 허벅지 위에 몰래 올려놓고 앞뒤의 친구들이 선생님의 주의를 끌면 치마 속을 비쳐보며 쾌재를 불렀다. 어느 날, 친구 중 한 명이 자기 집에서 시험공부를 같이 하자며 꾀었고 그날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우리는 친구 집 근처의 여인숙 담벼락 틈새로 숨어들었고 그날 밤 여인숙의 열린 창문 사이로 손에 잡힐듯한 거리에서 펼쳐지는 어른들의 정사장면과 열락의 소리는 참으로 압권이었다. 새벽녘,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귀가한 우리는 몇 년을 뛰어넘어 갑자기 쑥 자란 느낌으로 마주보며 의미 있는 미소를 나누었다.

관능의 미학
철이 들면서부터 많은 여인들을 만났다. 때로는 바람으로 스치며 때로는 홀연한 연기로 사라지는 인연들…. 지독히 관능을 자극하는 여인들과 간혹 인생을 논하고 때로는 영혼의 교감을 나눌 수도 있었던 여인들. 하지만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관능의 불꽃을 한줌의 재가 될 때까지 태워 줄 여인을 찾기는 힘들었다.
아, 한낮 꿈이던가. 그렇게 맞춤으로 찾아와 줄 여인은….

    내가 당신을 사랑함은
    당신의 희고 탐스런 몸맵시에 눈이 시려
    그러함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현기증 나는 감미로운 체취에 넋 놓코 취해버려
    그러함도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내 안의 황홀한 떨림을 감지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 안에 내가
    자리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의 배려와 사랑이 내 영혼으로 녹아들어
    내 안에서 당신과 내가 하나됨을
    그렇게, 의심 없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 그래서 내가 진정 당신을 지극히 여기는 것은
    당신은 나 자신이요 내가 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이치와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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