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아침은 전쟁통이다. 등교 시간과 출근 시간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만 아침마다 수만 가지 부산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생겨난다. 44년째 풀지 못한 아침의 미스터리들.
식탁 위에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과 사과 몇 조각을 함께 올려놓았다, 정성으로 따지자면 다소 부실할지 모르지만 나름으로는 단백질과 탄수화물, 지방이 골고루 들어간 계산된 아침 식단이다.
두 딸에게 알아서 먹으라는 말을 전하고 나도 바쁜 손놀림으로 출근 준비를 하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중간에 나와 보면 딸들은 허겁지겁 가방을 올려 메고 현관문을 나서고 있고 접시 위에는 한 입도 뜯지 않은 빵이 덩그러니 남아 있기 일쑤다.
어느새 식어버린 빵 접시를 들고 화장대 앞으로 가서 출근 준비를 마저 했다. 온기는 잃었지만 여전히 쫄깃한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물고는 로션을 바르며 입안에서 오물거렸다.
‘맛있기만 하고만, 좀 먹고 가지’
자기들이 남긴 빵인데도 이렇게 혼자만 먹고 있으면 괜스레 미안하다. 밥이랑 국을 줬으면 더 잘 먹었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40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흐릿해지는 눈썹을 화장으로 선명하게 고치고, 생기를 잃어가는 피부를 위해 주얼리 박스를 열었다. 자체 발광이 안 되면 보석의 힘이라도 빌려야겠기에.......
‘오늘은 큐빅이 큰 거로다...’
검지로 이리저리 귀걸이 상자 안을 흩치다 작게 빛나는 꽃 귀걸이 한 쪽을 집어 올렸다. 금빛 데이지꽃 아래로 더 작은 데이지꽃 2개가 연결된 드롭형의 골든 이어링. 늘 주얼리 박스에 담겨 있었지만 한 번도 바깥 구경을 한 적 없는 그 귀걸이를 나는 가만히 쳐다보다 도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15년 전의 어느 초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3년 차로 진급하면서 인천에 있는 한 종합병원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다. 그곳은 병원 규모와 비교하면 입원환자가 꽤 많아서 힘들기로 소문이 난 곳이었는데 당시 임신 초기였던 나는 울렁거리는 입덧으로 한참 더 예민해져 있었다.
4년 차로 올라가는 선배에게 인계받은 아이 중에는 2돌이 채 되지 않은 해솔이도 있었다. 창백한 듯 노르스름한 피부에 유달리 속눈썹이 진했던 아이.
“헤파토블라스토마(hepatoblastoma:간 모세포종) 환아로 오피(OP :수술)하기 전 케모(chemotherapy :항암치료)하고 있어. 케모 스케쥴은 여기 수첩에 정리되어 있고.......”
통상의 항암치료는 수술로 제거한 종양의 잔재를 박멸하기 위해서지만, 해솔이 경우는 달랐다. 진단 당시 종양의 크기가 간 전체를 거의 다 잡아먹은 상태라 수술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단 항암치료로 암 덩어리를 조금이라도 줄여 수술적 절제를 해보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고된 근무가 이어지던 어느 날, 온종일 입덧으로 속이 뒤집힌 나는 저녁 회진을 마치자마자 병원 바로 앞에 있는 과일가게에서 시큼한 빨간 자두를 한 바구니 샀다. 까만 봉지에 가득 담고서는 덜렁거리며 병원 본관으로 들어서는데 엄마 등에 업혀 보채는 해솔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나오고자 엄마 뱃속에서 칭얼대며 꿈틀거리는 한 생명과 희미해지는 가느다란 빛을 뺏기지 않으려고 엄마 등에서 버둥거리는 어린 생명이 마주하는 느낌이 서글펐다.
아이는 자신의 검사 결과를 예측이라도 한 걸까.
항암치료 효과를 판단하기 위해 치른 복부 CT에서 해솔이의 암 덩어리는 그간의 독한 치료가 무색할 만큼 더 커져 버렸다. 작은 배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험상궂게 생긴 종괴. 대체 왜! 왜 어린 이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모질 필요가 있는 건가! 하늘에 있는 누군가에게 화가 났다.
침대 위에서 새우등을 하고 잠든 작은 생명과 행여 자는 동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애타는 엄마의 슬프고 고된 표정이 CT 사진 위로 겹쳐졌다.
서울과 인천의 장거리 출근과 임신 초기라는 상황이 서로 맞물리면서 당시 나는 잦은 하혈을 했다. 아기집 아래에 피가 고였다고 했지만, 당시 의사의 근무 환경을 고려하면 가능한 조심 하면서 계속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임신한 전공의 앞에서 과장이란 인사가 소주 한잔 정도는 괜찮다며, 후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회식을 강요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자궁의 아기집은 더 견고해졌고 그 안의 생명은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그런데 주말 오프를 다녀온 어느 날 해솔이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새 환자를 맞이하기 위해 팽팽하게 당겨진 퍼런빛이 감도는 하얀 시트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두려움에 나의 아랫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미안하고, 불안하고 그리고 죄스러운 마음.
해솔이 엄마가 병동으로 나를 찾아온 건 그로부터 한두 달 후였다. 동년배 엄마의 푸석푸석해진 얼굴과 가르마를 따라 내려앉은 수많은 새치에 그만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미안해요. 어머니”
달리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저 고개만 숙이는데 그녀가 내 손을 잡더니 작은 선물상자를 건넸다.
“해솔이 앞으로 든 보험이 몇 개 있었는데. 애가 죽고 나니까 돈이 엄청 많이 들어왔어요. 그 돈으로 병원비도 갚고, 그러고 또 작은 집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생각나서요.”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 병동 데스크에 기대어 그 상자를 열었다. 해솔이를 닮은 귀여운 노란 데이지꽃이 병원 조명에 반짝였다. 속눈썹이 길었던 아이의 눈망울이 떠올라 나는 급하게 상자를 덮어 버렸다. 도저히 그 귀걸이를, 반짝이는 금빛 귀걸이는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꽃 귀걸이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내 손에 닿았던 해솔이 엄마의 슬픈 온기가, 그리고 싱긋 웃던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생각난다. 아마 살아있다면 지금쯤은 우리 큰아이보다 2살 많은 한창 멋 부릴 사춘기 여고생일 건데. 그래서 나는 그 귀걸이를 태연하게 걸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 귀걸이는 나에게 가슴에 깊이 박힌 아픈 손가락이다.
?아이의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