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남한 사람
- 연도2023년
- 수상동상
- 이름장성만
- 소속경북대학교병원·정신건강의학과
서울에서 공부하고 경기도에서 공중보건의를 거쳐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펠로우까지 마치고 나니, 이제 어디로 가나 싶었다. 마침 한강 이남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 명문 의과대학에 지원할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2007년에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비로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세부전문분야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고향도 서울이 아닌 터라 서울을 떠나는 데는 크게 주저함 같은 건 없었다. 문제는 대구 지역에 연고가 없고 주진료 대상은 노인이었기 때문에 현지 언어 적응에 약간의 어려움이 예상되었는데 역시 가끔은 곤란한 상황들이 있었다. 특히 인근 지역 농촌에서 오신 분들의 경우 자녀들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1년 이상 지내보니 웬만한 말은 빠짐없이 다 알아듣게 되었는데 유독 ‘남한 사람’이란 말은 이해가 안 됐다.
진료과 특성상 혈액검사 같은 수치화된 자료보다는 모든 걸 면담을 통해 알아볼 수밖에 없는데, 기분은 어떤지? 기운은 좀 나는지? 기억력은 괜찮은지? 등등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투약을 시작하고 나서도 하나 하나 관련 증상들을 파악해야 하는데, 간혹 “남한 사람이 이만하면 됐지예, 어이 하겠능교?” 이런 대답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남한 사람? 지금도 심하지만 당시에도 정치적 성향에 따른 대립이 심할 때라서 혹시 이게 무언가 지역적 이념을 담고 있나? 라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해 봤지만, 그건 절대 아닐 터. 포털에 검색해도 만족스러운 답이 없다. 문맥상으로도 도무지 어떤 걸 의미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어쩔 수 없이 남한 사람이란 말만 빼고 이해하는 수준으로 넘어갔다. 전공의들에게 남한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혹시 무슨 말인지 아느냐 물어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 어느날 갑자기 남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만은 사람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어라! 혹시 싶어 검색을 해보니 ‘나만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이란 걸 의미하는 지역 언어라고 한다. 그걸 몰라서 남한 사람으로 검색했으니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남한 사람들을 진료하던 중, 어느날 약이 잘 안 듣는다는 80대 어르신이 찾아 왔다. 잠을 못 잔다며 십 수년간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위주로 처방을 받았는데, 이젠 아무리 먹어도 잠이 안 온다는 것이다. 내내 누워만 지내는데다 “이젠 죽어야지”라는 말을 자꾸 반복해서 자녀들이 큰 병원에 모시고 온 것이다. 면담 결과 진단은 우울증이다. 이전에 한번도 우울증 관련 투약을 안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항우울제 위주로 투약을 하면서 상당히 좋아졌다. 수면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활력도 같이 좋아졌다. 표정도 밝아지고 이젠 밖으로도 나가고 해서 가족들도 매우 만족해 하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보호자 혼자 내원한 날이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운동을 좀 하겠다고 다니다가 턱에 걸려 넘어져 골절상을 입었고 지금은 다른 병원에 입원중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수개월 정도 요양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이전까진 어찌됐건 치료 결과가 좋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치료의 결과가 좋아도 이런 의외의 사건을 만드는구나 싶었다. 그 뒤로는 오랜 기간 쇠약한 상태로 지내다 회복된 남한 사람들에겐 많이 좋아졌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특히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라는 말을 하게 됐다.
하루는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치료가 안 된다는 60대 후반의 남자 환자를 만나게 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배운 것 없이 가족 부양을 위해 무던히도 부지런하게 살아온 고도 성장기 대한민국의 여느 가난한 가장의 스토리였다. 전에는 이렇다가도 시간이 좀 지나면 회복이 됐는데 지금은 아무리 약을 먹어도 회복이 안 되고, 이렇게 지낸 지가 2년도 넘는다고 했다. 양극성 우울증이 상당히 의심되는 환자였고 투약 후 조금씩 나아져 나중엔 완전히 좋아졌다고 매우 고마워했다. 가족들 모두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터에 잠시 자뻑에 빠져보긴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진 못 했다.
보름 정도 지났을까? 환자의 딸만 혼자 내원하게 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님께서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중”이라고 한다. 자녀들이 이제 일 같은 건 안 해도 되고 충분히 용돈을 드리겠다는데도, 굳이 그동안 돈도 못 벌고 또 자녀들 신세를 질 수 없다며 새벽에 리어카를 끌고 나가 폐지 수집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결국 척추 골절 사고를 입어 하반신 마비 상태인데 회복은 어려울 거 같다고 한다. 순간 여러 모순된 생각들이 밀려 왔다. 차라리 회복되지 않은 상태가 낫지 않았을까? 아니 그래도 회복은 시켰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 대가가 이렇게까지 상당할 줄이야. 그 후로 환자는 재활병원에서 생활하게 됐고 부인은 계속 간병하느라 같이 병원에서 살다시피 지내게 됐다. 환자가 내원하기는 힘들어 부인과 자녀들이 번갈아 약을 타러 왔다. 중간에 약을 중단해 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약을 먹어야 가라지지 않으니 계속 먹는 게 낫다고 한다. 약을 안 먹으면 더 가라앉고, 울고, 죽고 싶다 하고, 재활치료마저 안 하려 한다는 것이다. 가끔씩은 환자도 휠체어를 타고 가족과 함께 들르기도 하는데, 여전히 고마워한다. 그래서 그럴까? 어느덧 환자 나이가 여든이 가까워진 지금도 왠지 환자나 그 가족을 볼 때마다 마냥 미안한 생각이 든다.
주로 나이가 많은 환자들만 보아 와서 그런 건지 유사한 사고를 겪는 남한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보게 된다. 다행히도 대부분은 회복 가능한 사고였다. 좋은 의도, 나쁜 결과의 예는 우리 주변에서 찾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떤 남한 사람들에겐 좋은 의도에 좋은 결과였는데도, 좋았던 결과가 결국 나쁜 결과를 초래했으니 이게 과연 좋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나 싶다. 당연히 의사로서 책임은 없다 하겠지만, 일말의 미안함마저 없지는 않다.
좋은 의도에서 비롯되었고 좋았던 결과를 지나 나쁜 결과에 이르게 된 이런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위급한 환자를 살리기 위해 헌신한 동료 의사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묻는 안타까운 사건들을 가끔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과는 많이 다른 이런 상황은 뭐라 표현해야 하나? 나비효과란 말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걸로는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너무 의료사고 쪽으로만 생각한 걸까? 오랜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은 이건 일종의 역전이 현상이라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 환자에게서 우리네 부모님의 모습이 느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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