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잎푸른 배추김치
- 연도2005년
- 수상입선
- 이름김대곤 교수
- 소속전북의대 소화기내과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틀어진다고 하는데 유난히 무덥기만 한 올 여름도 계절에 밀려 막차를 타고 말았다. 이제 추석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진료가 끝난 오후 나는 차를 몰고 관촌으로 향했다. 동부 우회도로를 따라 아중리 호수를 바라보며 가는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낙비가 되었다. 죽림온천을 지나 관촌을 들어서면서 ‘전주 양복점’을 찾았다. 양복점과 세탁소를 겸하는 가게로 젊은 중년 남자가 다림질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안녕하세요? 이O식 씨 댁이 어디인가요?” 하고 묻자 그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잔뜩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왜 그러신가요?”
“아, 예. 저는 병원에서 온 의사인데요. 그 분한테 인사를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예, 저 앞 골목길 맨 끝 대문이 있는 집입니다.”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우산을 받고 철벅철벅 바지가 다 젖으며 골목에 들어섰다. 맨 끝 집 대문 기둥에 비 맞으며 붙어 있는 그 환자의 문패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지난 주 얼굴이 검게 그을린 낯익은 노인이 큰 비닐자루에 너무나 붉은 고추 한 자루를 끌고 진료실로 들어섰다.
“선생님 저희가 기른 무공해 양근 고추입니다. 좀 드리려고 가져왔지요.”
나는 벌떡 일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작년에도 주셔서 한 해 요긴하게 잘 먹었었는데 올해 또 가져오셨네요.”
그리고 나는 진료를 시작했다.
“요즘도 술, 담배 하세요?”
노인은 먼 허공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예, 가끔 큰놈이 생각나면 한잔씩 해요.”
‘예, 그래요.’라니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괜히 진료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노인은 B형간염과 간경화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오는 환자인데 큰 아들이 올해 봄에 전이간암으로 우리 병원에서 사망했다. 둘째 아들도 역시 B형간염 환자로 내 환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큰 아들이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노인은 출렁이는 바다 같은 눈을 끔벅이며 “어린 자식이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지만 다 장성한 자식은 어디다 묻어야 할지….” 하고 말했었다.
선물을 살까도 생각했지만 농촌에서는 가장 귀한 게 현금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쓴 시집 두 권과 봉투에 현금을 조금 넣어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두 노인이 사시는 시골집에 들어섰다. 비 쏟아지는 마당을 거쳐 반갑게 맞아주는 순박하신 할머니를 따라 거실에 들어섰다. 할아버지는 들에서 돌아와 목욕중이라고 하셨다. 곧이어 온 살이 구릿빛인 할아버지가 팬츠만 입고 나오시다 깜짝 놀랐다. 아마 빗소리 때문에 내가 거실에 들어온 것을 몰랐나 보다.
“아이쿠, 선상님 이게….”
“아, 예. 괜찮습니다. 아직도 들일을 많이 하시나 봐요. 좀 쉬면서 살살하시지.”
우리는 거실에 앉아 주스를 마시며 그럭저럭 세상 사는 일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결국 자식 얘기며 큰아들 얘기가 또 나오게 되었다.
“큰 애가 너무 일만 알고 몸이 망가지는 것을 몰랐다우. 늦게 알게 되어 서울까지 가서 수술을 했는데 소용이 없었어요. 선상님, 이 양반이나 둘째 놈은 꼭 살려주셔야 되요.”
할머니는 너무 간절하게 말씀하셨다.
“아, 예. 두 분 다 조심하고 약을 잘 드시면 걱정 없습니다. 요새는 좋은 약들이 많이 나와요.”
나는 그렇게 두 노인을 위로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선상님 오신다는 전화 받고 저희가 김장김치하고 멸치 한 봉투 준비했으니까 가져 가셔요. 김장김치는 우리가 심어 가꾼, 농약을 안 친 잎 푸른 배추로 담아 맛이 좋을 거에요.”
나는 너무 감사하다는 말과 가져간 책과 봉투를 억지로 드리고 김치통과 멸치 봉투를 차 뒤 트렁크에 실었다.
먼 길거리까지 따라 나와 어서 잘 가라고 손짓하며 서 있는 두 노인을 보고 우리 부모님을 생각했다. 자식들 다 여의고 아파트에서 두 분만 사시며 이젠 척추병으로 고생하면서 적적해하시는 부모님께 전화도 자주 못 드리고 잎 푸른 김치 한번 갖다 드리지 못했다.
집에 와서 김치통을 열어보았더니 젓갈 냄새가 맛있게 방안에 가득찼다.
나는 문득 옛날 남원 주천면에 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노란 속 배추는 양배추가 많았고 잎 푸른 배추는 서울배추라는 품종이 있었다. 잎이 가지런히 모아지도록 지푸라기로 묶어 김장철에 맞춰 뽑아 밭둑에 쌓아 놓았다가 모양이 좋은 것은 골라 리어카에 실어 읍내에 가서 팔곤 했다. 그때는 주로 내가 리어카를 끌고 어머니가 뒤에서 밀며 따라오셨다. 좋은 값에 일찍 넘기는 날이면 여유롭게 노을에 젖은 요천강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수면이 나의 미래일 것이라고 흥얼거리면서 이십 리 길도 멀다 않고 단숨에 집에 갈 수 있었다.
앵두나무가 서 있는 우물가에서 잎 푸른 김치를 담는 날이면 고향집에서는 어른이나 애들이나 흰 깨가 묻은 붉은 가닥김치를 하늘에 쳐들고 입을 크게 벌려 받아먹으면서 매워서 후후 입바람을 불곤 했었다. 또 점심에는 따뜻한 햅쌀밥을 해서 가닥김치를 밥 위에 걸쳐 김장일 하시는 이웃집 아주머니들과 먹곤 했었다.
잎 푸른 김치를 보고 감칠맛 나는 젓갈 냄새를 맡으며 나는 이 김치를 아파트에 사시는 부모님에게 나누어 보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무 근이나 넘는 고추를 힘들게 들고 오셨던 노인의 간경변과 남은 둘째 아들의 간염이 좋아지기를 기원해 보았다.
오늘도 어렸을 때 본 그 노을 지는 요천강의 잔물결이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반백의 나이든 의사가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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