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반지와 립스틱
- 연도2005년
- 수상입선
- 이름김미진 과장
- 소속홍익병원 내분비내과
“김미진 선생님! 102 병동입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응급실에서 농약 중독 환자를 입원시키고, 잠깐 졸았던 것 같은데 수 차례 open call이 울렸다.
‘누구지?’
아침 회진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당직실에서 맞는 잠시의 새벽 단잠도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듯 싶다.
‘아, 미란이 때문인가?’
고미란.
12살 소녀이다. 미란이가 우리 병원 102 병동에 입원한 지 올해로 꼭 4년째이다. 아마 이렇게 장기간 입원해 있는 환자도 없었을 것이다. 미란이는 골육종(osteosarcoma) 환자이다. 골육종은 뼈에서 기인하는 악성종양으로 청소년기에 잘 생기는 병이다. 수 차례 재발하였고 항암치료에도 반응이 없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것 같다. 지금은 암세포가 복강 내로 퍼져서 방사선 치료중이다.
미란이가 우리 병원에서 유명해진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데메롤(통증 완화를 위해 사용하는 마약 계통의 진통제)이 가장 많이 처방되는 환자로 유명했고, 그의 아버지 때문에도 유명했다. 미란이 아버지가 병원에 있는 적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 보호자 동의서가 필요한 검사를 할 때면 곤혹을 치르곤 했던 것이다. 간혹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나타나서는 병원 직원들한테 끌려 나가기가 일쑤였다. 한밤중에 연락을 받는 경우는 대부분 미란이가 요구하는 진통제 아니면 미란이 아버지 때문이었다. 오늘의 open call도 아마 이 둘 중의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나 한번 껴 보면 안 돼요?”
복수 때문에 가득 부풀어 오른 배에 천자 바늘을 막 찌르려 할 때 미란이가 불쑥 물어왔다.
“뭐?”
“선생님, 반지요….”
당직 날 불쌍하다고 친구가 사다 준 반지로, 너무 작아서 새끼 손가락에 거의 걸치다 싶게 낀 반지였다. 잘 끼지 않다가, 친구가 수시로 확인하는 바람에 오늘 모처럼 끼고 왔는데 제 눈에는 예뻐 보였나 보다.
“그래. 대신 복수 다 빠질 때까지 움직이면 안 된다! 한번에 다 안 빠지니까 자꾸 찔러야 하잖아. 절대로 움직이면 안돼! 알았지?”
미란이의 배는 바늘 자국과 흉터로 더 이상 찌를 자리도 마땅하지 않았으나, 난 반지라는 미끼로 이곳 저곳을 찔러도 되는 일종의 허락을 받은 셈이었다.
그날 이후로 반지는 미란이 두 번째 손가락에 고이 끼워져 있었고, 친구는 반지를 잃어 버렸다는 내 말에 엄청 섭섭해하면서 똑같은 걸로 사다 주겠다며 볼 때마다 나를 위로했다.
미란이의 통증이 데메롤로는 더 이상 조절되지 않아 모르핀을 쓰기로 아침 회진 때 결정했다. 모르핀은 갑자기 호흡 중추를 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용량을 높여야 하며, 혹시나 호흡이 정지할 수 있기 때문에 보호자 동의 후에 사용해야 한다.
“미란이 아버지는 어디 계신 거지?”
못 뵌 지 보름이 지난 것 같았다.
똑똑똑.
당직실 문을 누가 세차게 두드린다.
“누구세요?”
“미란이 아버지인데요…. 선생님 계세요?”
‘다행이다. 빨리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데….’
미란이 아버지는 오늘도 거하게 취해서 발그스름한 얼굴로 당직실 앞에 서 계셨다. 한번도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는데….
“선생님께 우리 미란이가 전해 주라는 게 있어서요. 얼마나 챙기는지…. 요 밑에 병원 매점 화장품 코너에서 샀어요. 미란이가 일러준 대로 샀는데…. 마음에 안 드시면 바꾸셔도 된데요…. 좋은 것만 쓰실 텐데, 죄송해요…. 그리고 미란이가 많이 고마워해요. 고맙습니다. 정말 마음에 안 드시면 바꾸셔도 되요. 제가 잘 살 줄 몰라서요…. 생전 사 봤어야죠.”
빨간 립스틱, 정말로 빨강색 립스틱이었다.
“너, 요새 이상하다? 불만 있니? 얼굴도 허옇게 뜬 애가 웬 빨간 입술?”
빨리 좀 지웠으면 하는 얼굴로 다들 쳐다본다. 상관없었다.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그 아이가 준 선물이었으니까. 너무 소중했고 고마웠으니까.
미란이는 처음으로 다인실을 나와서 일인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보호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임을 다시 한번 설명해야 했다.
“선생님! 나 한번만 학교 갔다 올게요. 앰뷸런스 타고 가면 안 될까요? 금방 갔다 올게요. 소원이에요.”
또 한번 동의서를 받아야 했다.
“나가서 갑자기 잘못될 수 있고요, 본인이 가겠다는 거니까 저희는 책임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미란이는 돌아오겠다는 시간에 정확하게 병원에 돌아왔고, 바로 저 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작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많이 울어본 것도 그때 뿐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아야 하는 반지를 내게서 받고 나서 그렇게 행복해 했던 그 아이의 모습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앞으로 수많은 환자를 보게 되겠지만, 미란이는 항상 내 가슴속에 묻힐 것이다. 내가 주었던 반지가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기쁨이 되었고, 선배들의 눈에 반항으로 비춰졌던, 내게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던 빨간 입술을 보면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기뻐했었다면 그걸로 족했다. 너무나 짧은 삶을 고통 속에서 살고 갔던 미란이가 안쓰럽고, 항암제로 다 빠져버린 그 작은 머리에 예쁜 모자라도 하나 사서 씌워 줄 걸하는 미련이 남는다. 그리고 많이 미안하다. 너무나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