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소개

국민의 건강과 함께 해 온
보령의 제품소개입니다.

투석상담실 바로가기

제품검색

보령의 제품들을 간편하게
검색할 수 있습니다.

건강투석

투석관련 정보를 안내합니다.

제품소식

제품관련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창닫기

R&D

건강한 인류를 꿈꾸는 기업
보령은 세계를 향하겠습니다.

R&D비전·전략

보령은 글로벌 기업을
목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파이프라인

미래 제약업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보령의 주요 연구 활동입니다.

창닫기

Investors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기업
보령의 IR정보입니다.

재무정보

보령의 재무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공시

보령의 공시현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가정보

보령의 주가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주주문의

보령 투자자 여러분의
궁금증을 문의하실 수 있습니다.

창닫기

ESG 경영

보령의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환경·사회적 책임경영을 소개합니다.

환경경영

보령의 환경경영 활동을
소개합니다.

안전경영

보령의 안전경영 활동을
소개합니다.

윤리경영

보령의 공정거래자율준수
프로그램과 부패방지방침을
소개합니다.

상생경영

보령의 투명한 기업활동과
공정한 경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소개합니다.

인재경영

보령의 인재육성제도와
문화를 소개합니다.

사회공헌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보령의 사회공헌활동을
소개합니다.

지배구조

보령의 지배구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지속가능한 경영으로의 패러다임
혁신, 보령이 앞장서겠습니다.

제안/제보하기

이해관계자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습니다.

창닫기

홍보

건강한 인류를 꿈꾸는 기업
보령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뉴스

보령의 생생한 뉴스를
전달드립니다.

광고

보령의 영상 및 인쇄
광고를 소개합니다.

홍보동영상

보령의 활동 정보를
소개합니다.

보령사보

보령사보를 소개합니다.

2009~2021

웹진 BORYUNG

보령의 웹진 BRing을 소개합니다.

2021~

창닫기

고객지원

고객지원

고객의 질문과 건의사항을
반영합니다.

정보보호

정보보호 정책 및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소개합니다.

소비자 불만 표준 프로세스

소비자 불만의 적용범위와
프로세스 세부지침을 소개합니다.

창닫기

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이 복도에서는

  • 연도2015년
  • 수상대상
  • 이름김예은
  • 소속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종합병원 복도를 오래 서성거리다 보면 / 누구나 울음의 감별사가 된다’

  대학생 때 처음 적어놓았지만 의사가 되고 나서야 자주 꺼내어보는, 나희덕 시인의 ‘이 복도에서는’ 이라는 시 첫 연이다. 병원에서 울음소리를 많이 듣다보니 죽음에 대한 어떤 울음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의 감별사가 되더라는 이야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별사가 되기에 내가 아직까지 들은 울음소리는 턱없이 적겠지만, 무의식적으로 마음 깊이 가라앉혀 놓았을 죽음에 대한 감정들이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꿈틀거리는 느낌에 자꾸 찾아 읽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이 시의 끝은 다음과 같은 연으로 마무리가 된다.

‘마른 시냇물처럼 오래 흘러온 / 이 울음의 야적장에서는 누구도 그 무게를 달지 않는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의 ‘울음의 야적장’은 중환자실과 수술실이 마주보고 있는 2층 복도가 가장 맞을 것이다. 병원 안 세상도 이미 병원 밖 세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 있지만, 10층까지의 복도 중에서도 이 2층 복도를 지나다보면 병원 안에서조차 따로 분리되어버리는 느낌에 휩싸일 때가 있다. 두 손을 꼭 쥔채 기도하는 사람들,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흐느끼는 사람들, 크게 울음을 뱉어내는 사람들, 뜨겁게 울음을 삼키는 사람들, 울다 지쳐서 멍하니 주저앉은 사람들…. 앞만 보고 걸어도 내 시야에 그들이 들어오면, 혼자 흰 가운 입은 이방인이 되어 그들의 세상을 건너가는 느낌이 든다. 그 복도를 지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 병원은 내 흰 가운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내 공간 같았는데 말이다.

  사망선고를 내리는 상황 속에 있어본 적이 여태 총 다섯 번뿐인, 나는 아직 의사선생님이란 말보다 인턴선 생님이란 호칭이 더 익숙한 새내기 의사다. 그래서인지 불편하고 아직은 낯선 감정들은 소화되지 않은 채 마음대로 다시 꺼내어지곤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신경외과를 돌 때 느꼈던 일이다. 새벽 1시가 되어갈 무렵, 쌓였던 일을 마치고 중환자실에서 나가려던 참인데 간호사분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곧 돌아가실 환자 한 분이 계신데….”

  사망환자가 생기면 내가 중심정맥관과 동맥 주사바늘을 빼야 하기 때문에 숙소에 가도 금방 다시 와야 될거라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가실 예정이라는 그 환자는 지주막하출혈로 혼수상태였고 이제 60대에 접어드는 연세인데, 이미 몇 차례 심정지로 여러 번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후에도 소생 가능성이 희박하여 DNR(심폐소생술 금지) 동의가 된 상황이었다. 점점 심박수와 혈압이 떨어져가는 상황이며 보호자도 밖에서 대기중이라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내일 수술할 환자들의 상태나 더 보고 있자는 마음으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뭔지 표현하기는 힘들게끔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마치 잠이 안 올 때처럼 1초, 1초 흐르는 게 예민하게 느껴지면서 그 시간들이 무겁게 어깨를 누르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또 내려오기 귀찮으니까 다 끝내고 갈 생각만으로 앉았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그 환자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는 환자였지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데에 내가 나쁜 의사처럼 느껴지며 무력감과 허무함이 덮쳤다. 그 환자분이 더 빨리 돌아가실수록 내가 그만큼 일찍 숙소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상황 자체도 썩 기분이 별로였다. 그런 복잡한 감정 속에서 차라리 잠들길 바라며 엎드려 있는데 사망선고는 생각보다 일찍 내려졌다. 곧 그 환자의 아내분이 오열하는 소리가, 영원한 이별이라는 죽음 자체가 가슴 깊이에서부터 끌어오는 울음이 중환자실의 새벽을 채웠다.

  환자의 소생가능성이 희박함을 ‘인정’하고 대처를 하는 것도 분명 의료의 중요한 부분임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보는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건, 이유야 어쨌든 그 결과가 죽음이라면 내게 보호자들을 더 위로해줄 수 있는 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환자를 편하게 보내드리는 게 나은 것인지 소생가능성 평가가 내 의료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중요하고 위로가 되는 길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은 매한가지다.

  올 해 초 나도 할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설에 뵈었을 때 다리 함요부종이 심하시길래 이뇨제 드셔봐야지 않겠냐는 정도의 이야기를 했고 내가 첫 응급실 근무에 적응하느라 매일 정신이 없던 즈음에 요양병원에 가셨단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는 자궁암 말기이고 적극적인 치료를 하기엔 연세가 많고 늦은 상황이었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가로막고 의료적 처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위로가 되어주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점점 더 안 좋아지시는 모습을 보며 내 이름 앞에 의사라는 두 글자가 슬프고 무거웠다. 응급실 근무 중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영정 앞에 선 날, 나는 물에 푹 적신 수건처럼 가슴을 쥐어짜내며 울었다. 가족도 아닌 환자들의 작은 상처까지 다 봐주면서 막상 할머니 앞엔 의사손녀가 아닌 그냥 손녀로 서게 된 내 모습에 서러움이 더 북받쳤던 것 같다.

  무엇이라도 해드렸었더라면 마음이 덜 아플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데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면서 지켜보는 일이 어쩌면 아픈 사람보다도 더 아프고 괴로운 일이다. 그 괴로운 일을 매일같이 겪고 있는 게 환자의 보호자들이라는 걸, 환자들 곁에서 부담이라도 덜 주고 기운내라고 웃는 그들 앞에서 자꾸 잊게 되곤 한다. 환자가 아프다고 할 때 우리는 진찰도 하고 처방도 낼 수 있지만, 환자 대신 아파주기라도 하고 싶을 보호자들은 정작 우리를 부르고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지켜보고 기다리는 일이 병원에서 그들의 매일인 것이다. 그걸 생각해보니 유난히 예민하고
극성스러운 보호자들이 그만큼 더 의사에게만 기대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응급실을 돌면서도 환자와 보호자가 의사에게 화를 낼 때 그건 불신보다는 불안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느꼈다. 내가 하고 있는 노력을 몰라주는 것 같을 때에 서운하더라도 의식적으로 자꾸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들이 나를 왜 믿지 못할까가 아니라 얼마나 내게 신체적, 심리적으로 기대고 있을까에 대해서.

  아픈 사람에게 무언가라도 해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사라서 가질 수 있는 기쁨이자 자기위로의 기회이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치료를 해볼 능력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지, 할 수 없어지면 그 땐 우리도 보호자들처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 된다.

  “업무원님, 7번 베드 정리해주세요.”

  내가 사망선고가 내려진 환자의 몸에 꽂힌 바늘들을 다 빼고 지혈된 것까지 확인하자 간호사가 다음 일을 진행했다. 그 환자의 자리는 금방 그렇게 다음 환자를 위한 자리가 되었다. 중환자실을 나서 2층 복도에서니 수술실 대기 공간 근처에서 아내분의 울음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 울음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 것 /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걸어갈 것’

  나희덕 시인의 말처럼 이 울음의 야적장에서는 누구도 그 무게를 달지 않는다. 이제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울고 싶을 만큼 편하게 울 수 있도록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것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보내야 할 땐 보내야 하지만 울어야 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만큼 보호자들과 함께 아플 수도 있는 의사가 될 수 있기를. 어쩌면 이 복도에서는 불편한 마음을 떨쳐낼 게 아니라 이 시를 꺼내어보듯이 자주 꺼내고 만져보는 게 맞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