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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그 해 여름

  • 연도2005년
  • 수상입선
  • 이름김인호 원장
  • 소속김인호 소아과


짙푸른 강물이 갈색 내음을 풍긴다. 안개 속으로 파고드는 아침햇살도 더운 입김이 남았으나 이미 쇠잔해 보인다. 벌써 가을이 저만큼 오고 있음인가. 나에겐 여름날의 추억이 많아 이맘 때는 그 흔적들이 들춰진다. 폭염이 재즈처럼 나의 감정을 흔들어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캄캄할 때까지 뒹굴던 수영만의 파도타기, 고3 여름 막바지를 잡고 만취된 친구들과 밤새 휘젓던 월내 백사장, 결혼 전 지금의 아내와 사랑을 나누던 일광의 낭만스런 해조음과 낙조같은 그림…. 이 모든 것들이 시디롬에 기록된 것처럼 잊을 수 없지만 일상에 숨겨져 있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해 여름은 잊혀지거나 감춰지지 않는다. 어디서나 뜬금없이 떠올라 울분으로 허탈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25여 년 전, 아들 형제가 네 살, 여섯 살이고 내가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던 그 해였다. 군의관 때 두 아이가 태어나고 제대 후 바로 전공의로 들어가 결혼하는 바람에 여름휴가 한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그래서 4년 후 전문의가 되면 번듯한 바캉스를 가자고 가족 모두와 다짐을 해 두었다. 그 해 3월에 전문의가 되어 스텝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약속대로 여름휴가를 위해 8월초 휴가와 여윳돈을 넉넉히 마련했다. 아이들에게도 이번 여름은 바닷가에서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슬쩍 일러 두었다. 8월을 기다리는 두 형제를 보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날짜가 다가오자 목적지를 대천 해수욕장으로 정했다.
그날 우린 일찌감치 대천행 좌석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입석 승객이 몇 명 있었으나 모두 밝은 표정이었다. 차는 바람을 가르며 달렸고 차창 밖의 시골냄새가 얼굴을 스쳐 감미로웠다. 불덩이 같은 한 여름날의 뜨거움은 우리에게 오히려 축복이었다. 쳇바퀴 돌던 병원 일상을 떠나는 나는 들떠 있었고 아이들과 집사람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두 시간쯤 달렸을까 갑자기 젊은 여자의 등에 업힌 아기의 울음이 버스 안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승객들은 아기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자지러지게 울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자주 듣던 울음소리였기에 해풍 속에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애기 좀 달래 보세요!”, “그만 좀 울리세요!” 이곳 저곳에서 짜증스럽다는 듯이 어머니를 채근하였다. 하지만 아기의 울음은 그칠 줄 모르고 어머니는 내 옆을 서성거리며 젖을 물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보채고 울던 아이가 갑자기 왈칵 구토를 하지 않는가. 버스 안은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드디어 집사람이 안타까운 듯 내내 자는 척하던 나에게 뭘 꾸물대느냐는 눈길을 주었다. 순간 망설였다. 휴가 가는 길목까지 와서 또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하는가. ‘얼마 후면 대천에 도착할 텐데.’하고 집사람의 눈총을 무시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아빠! 아빠가 아기 좀 봐 주세요. 아기가 많이 아픈 모양이에요. 아빤 소아과 의사잖아요.”라는 작은 아들의 느닷없는 외침소리와 동시에 주위 승객들의 눈길이 내게 쏠렸다. 나는 외통수에 걸렸고 마지못해 아기를 받아 내 자리에 눕히고 진찰을 했다. 아기는 장중첩증이었다. 종합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자 버스 기사도 이해 한 듯 택시를 잡아 주었다. 병력을 적은 내 명함을 아기 아버지에게 쥐어 주며 B병원 응급실로 가도록 일러줬다. 승객들도 안심이 되는지 우리 가족에게 고운 눈빛을 주었고 아들 녀석들도 덩달아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단한 일을 한 양 집사람 어깨에 머리를 넌지시 기댔고 한 여름을 가르듯 버스는 대천으로 달렸다.

대천 터미널은 인파로 몹시 붐볐다. 우린 늘어 선 택시 쪽으로 걸어가 비교적 뒤에서 급할 것 없이 차례를 기다리는 턱수염 기사에게 몸을 실었다. “기사님! 해수욕장 가까이 제일 괜찮은 호텔로 갑시다. 예약은 안 했지만 방이 있겠지요?” 타자마자 기사에게 부탁을 하자 기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철 장사이니까 방이 없다 해도 만들어 낼 겁니다. 걱정마세요.” 하며 고개길을 올랐다. 고개를 넘자 저 편에 수평선이 보이며 탁 트인 백사장에 수영복 차림의 인파와 그늘 천막들이 펼쳐져 보였다. 우리 가족 모두 “우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제 그렇게 기다리던 여름 바캉스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대에 찬 환호성이었다. 그런데 백사장이 가까워져 택시요금을 준비하려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순간 아찔해졌다.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입안의 침이 말랐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심상치 않은 느낌으로 묻는 집사람의 목소리 또한 떨렸고 안색은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 당시는 신용카드나, 현금인출기 같은 것이 전혀 없던 때라 현금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기사 아저씨!” 다급히 부르는 내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고 충격 속에 격분함이 깔려 있었다. “대천읍 경찰서로 차를 돌려주시죠….” 그제야 눈치를 챈 기사는 차를 천천히 돌리면서 “손님도 당하셨군요…. 허허, 참!” 혀를 끌끌 차지 않는가.
장판 밑에서 불개미들이 득실거리는 대천 역 앞 어느 여인숙에서 라면으로 점심 겸 저녁을 때웠다. 텔레비전도 없어 하염없이 창 밖을 보고 있는데 그날 밤은 웬 여름비가 후드득 후드득 양철 지붕을 때리는지, 지쳐 잠이 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너무도 긴 밤이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대천 역으로 나갔으나 결국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쯤 도착한 완행열차를 탔다. 덜컹거리며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고 아이들 역시 조용했다. 집사람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걸음에 은행으로 내달려 턱수염 기사에게 꾼 돈을 송금하였다.
낯선 땅에서 그 기사의 온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기사가 그 해 가을 위암 초기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우리 부부는 그가 입원하여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하는 동안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 그 후 그곳 택시 기사들에게 우리 이야기가 한동안 화제가 됐고, 오랫동안 대천 택시 기사들은 가족이나 손님들이 아프다고 하면 내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메모를 들고 찾아온 그들을 턱수염 기사를 대하듯 보살펴 주었다. 
지금도 가끔 집사람에게 그 소매치기는 횡재했을 거라며 농담을 하지만 그때의 황당함은 아직도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 후로 대천은 한번도 가지 못했다. 그 일은 내게 상흔으로 자리잡고 있으나, 당시 너무 억울해 했던 아들 형제에게는 오히려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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