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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어느 하루의 이름

  • 연도2017년
  • 수상동상
  • 이름김대현
  • 소속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한 시대를 마감하는 한 가지 방법은 딱 맞춤한 이름을 거기에 붙이는 것이다. - 이반 일리치

 

한 사람의 인생도 그렇다. 그가 죽는 날 그의 삶에 이름이 붙는다. 심지어는 마지막 날이 어땠는가가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을 부르는 제대로 된 이름인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까

내가 10여 년 전 겪었던 어느 하루는 사람들이 한 사람을 살리려고 했던 날이다. 하루의 끝에 그날을 그렇게 이름 지었다. 우리는 그의 일생 중 단 하루만 이름 붙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모두가 살리고 싶었던 삶이 되었다.

 

집도하는 교수님은 고민에 잠겼다. 혈관을 꿰맨 부위에서 출혈이 멈추질 않았기 때문이다. 4년차 선배와 전공의 1년차인 나는 그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멈출 것이라 걱정하며 수술부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당시 대동맥 박리증은 죽음을 부르는 병이었다. "치료하지 않으면 1시간에 1퍼센트씩 죽습니다." 의사가 설명하기도 쉽고 환자가 이해하기도 쉽다. 하지만 환자가 이 말을 이해했다는 것은 자신에게 남은 수명이 시간단위로 계산된다는 것이다. '100시간이 남았구나...’ 상황을 확실히 인식한 환자는 수술을 거부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생의 마지막 결정이 되더라도 수술 동의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수술실 안은 긴박했다. 아무리 봉합해도 피는 혈관 틈을 찾아 새어나왔다. 환자의 생명도 같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 상황이면 전공의인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혈액을 구하러 가는 것이다.

“김선생. 나가서 피 좀 구해봐.

집도 교수님의 말에 나는 무겁게 수술실을 나섰다. 혈액을 구하러 수술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더 이상 수술실로 혈액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고, 병원에 있는 혈액이 이미 바닥났다는 것이다. 이제 피는 사람들에게서 직접 받아내야 한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환자의 지인들이 달려온다. 중환자실 앞에 몇 사람이 있겠거니 예상하고 올라갔는데 이때는 좀 달랐다.

“이 학생들 누구에요?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는 중환자실 간호사에게 물었다.

“환자분 제자들이래요.

“면회 온 거예요? 수술은 언제 끝날지...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아뇨. 헌혈하러 온 거래요” “몇 명이나 왔데요?

“쉰 명도 넘어요. 몇 십 명쯤...

 

중환자실 앞 대기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 때로는 '집단'이라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준다. 50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이 헌혈하러 몰려온 것이다. 학생들은 경쟁하듯이 서로 먼저 팔을 내밀었다. 분주함이 생각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 행동들이 더 뭉클했다. 과연 생각이 필요했을까?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헌혈을 하려는 자세에는 심지어 활기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그 의욕을 잠시 안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일단, 혈액형이 맞아야하니까. 검사부터 합시다.

 

몇 십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마치 죽어가는 사람에게 핏줄을 연결하겠다는 듯 팔을 뻗어내는 모습은 ‘생각’이 필요 없는 본능적인 행동 같았다. 혹시 지금까지 환자를 살려왔던 의술이 이런 본능에 기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의학이 한계를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러면 의사들은 똑똑한 의학을 핑계삼아 뒤로 물러선다. 그때 그를 살리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피를, 장기를, 심지어는 생명을 내어준다. 의사들은 그것을 받아 모자란 피를 채우고, 병든 장기를 메꾸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눠주기 위해 갖고 있었던 몸’이었다는 듯이 수혈과 이식에 자신의 것을 내어준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살고자하는 본능에 공감하는 다른 사람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철길로 뛰어들 때의 그 본능처럼.

 

나는 살고자하는 본능도 살리고자하는 본능도 잘 몰랐다. 의학이라는 눈으로 환자를 대하다보면 사람이 살 수 있는 확률이 머리속에서 가늠되고 때로는 그것이 내가 노력해야할 잣대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 잣대를 들이대며 사람들의 절실한 희망을 꺾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무의미한 치료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하고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의사의 책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환자의 생명을 계산했던 것이다.

 

헌혈을 하고난 학생들은 담겨진 피를 보고 또 나를 쳐다봤다. 내가 그 피로 무언가를 해내리라 기대하는 것 같았다. '50명의 피. 이 피를 가지고 살려야 하는데…’ 걱정이 피처럼 쏟아졌다. 수혈이 선생님을 반드시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먼저 만들어진 혈액을 들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혈액백을 안아든 팔에 온기가 느껴졌다. 피를 통해 사람의 체온이 전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나는 의사가 아니라 체온을 나르는 사람이었다. 치료하는 의사는 그 학생들이었으니 말이다. 의술은 의사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베푸는 것이다. 단지 의사는 그 인간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날, 우리는 흘러나오는 피만큼 피를 흘려주었고 학생들은 흘려주어야할 피만큼 자신의 것을 공급했다. 그것은 쉼 없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열 시간 남짓의 수술은 피가 모자란다는 결론이 아니라 희망이 모자란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달려온 것을 알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단지 무언가가 있었다면 수혈이 있었을 뿐이다. 선생님은 제자들의 피가 자신의 몸을 흘러갔다는 것을 아셨을까?

 

그날 밤 학생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이내 선생님의 부고가 그들을 쫓아갔을 것이다. 그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노력이 쓸모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생님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이라면 실망이 아니라 슬픔이라 말해야 하겠다. 그런데 우리 의사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실망했다. 치열했던 하루의 끝이 환자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백명의 사람이 모여도 한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 의미 없는 치료였을까? 우리는 실망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결과가 죽음인 치료에도 어떤 의미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선생님과 제자들을 잠시라도 이어주었기를 바랐다. 의사는 살고자 하는 본능과 살리고자 하는 본능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한다. 결과가 비록 죽음으로 끝날 지라도 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인간을 향한다. 인간들에게 삶이 주어지면 삶을 지탱해줄 힘도 같이 주어지는 것일까? 생명이라는 것은 너무 약해 위험이 불어 올 때마다 꺾어지듯 흔들린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본능이라는 팔로 생명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 팔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이 우리를 위로한다. 비록 꺾어지고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신세가 되더라도 바람을 탓할 뿐 우리를 붙잡아 주었던 팔들에게 고마워하며 자신이 '인간'이었음을 느낀다. 나는 그날 그 팔들을 보았다.

막 의사가 된 그때. 시계바늘은 수술과 출혈, 수술과 죽음 그리고 수술과 생존이라는 서로 다른 곳을 가리켰지만 한 바퀴 돌아 다시 똑같은 곳을 가리키면 나에게는 늘 있는 수술, 늘 있는 죽음과 삶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죽음은 특별하지 않았다. 매일 세상 어딘가에서 태어나는 소리가 있듯 세상 어딘가는 그 소리에 묻힌 죽음이 있다. 어느 날이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이것이 죽음을 평범하게 생각해야하는 이유일까? 여러 죽음이 엇비슷하게 보이지만 죽음으로 맺히는 삶은 저마다 다르다. 모두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삶의 꼬리표라면 각자의 삶들에 각각 다른 죽음이 매달려있을 것이다. 죽음은 평범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은 평범하지 않다.

 

죽는 날 그의 삶에 이름이 붙을까? 아니다. 사람이 죽는 날 그 죽은 사람으로 인해 오히려 그날의 이름이 정해진다. 그날로 인해 내가 의사로서 보내왔던 수많은 날들이 각자의 이름을 들고 다시 떠올랐다. 하루하루는 그날 죽은 사람의 이름이다.

 

그날. 환자가 있었고, 의사들이 있었고 스승을 살리려는 제자들이 있었다. 의사는 환자를 살리려 했고 제자들은 스승을 살리려 했다. 그날은 그가 죽은 날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를 살리려했던 날이다.

의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인성이라 말한다. 이 말은 진실이지만 부족한 진실이다. 의사가 되어 환자를 대하다보면 그제야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 환자들... 마치 의사를 치료하기 위해 아프기라도 한 듯이 그들은 도리어 의사들의 마음을 치유한다. 그 덕분에 오늘도 나는 겨우 의사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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