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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얼굴

  • 연도2018년
  • 수상동상
  • 이름김부경
  • 소속고신대학교 복음병원 내분비내과

“경아, 왼쪽 눈이 안감긴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오후 8시를 조금 넘었을 때였다. 안면마비 증상이었다. 나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오전부터 그랬다는데, 이제 전화하면 어떡하냐고. 누가 내 모습을 봤다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신입사원을 나무라는 사장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테지. 


“그걸 이제 전화하시면 어떡해요?”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던 나에게 돌아온 엄마의 대답이 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나는 니 바쁠까봐….” 


나는 그시간에 정말 바빴을까? 나는 언제나 바빴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바쁘진않았다. 수십명씩 밀린 외래진료, 각종 강의와 강의준비, 진행중인 논문들, 병원과 학교의 회의들. 그렇지만 그와중에서도 교수님들의 전화도 바로 받고, 환자를 문의하는 선배들의 전화도 즉각 받곤 한다. 틈틈히 카톡으로 전공의들에게 보고도 받고 지시도 내리고, 친구들과 잡담도 한다. 짬짬히 SNS도 하고, 방에 돌아오면 멍하니 포털 사이트를 배회하기도 한다. 도데체 엄마의 전화를 못받을 만큼 바빴던 적이 언제 있었던 걸까? 엄마는 왜 내가 바쁠까봐 전화를 못하셨을까?


나는 엄마에게 그리 좋은 딸이 아니었다. 진료 중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면 내용을 들어보지도 않고, 지금 진료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해놓곤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회의 중에는 안받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가 나에게 전화를 못하신 진짜 이유는 내가 바쁠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아프다고 엄마에게 말하는 것이 싫었다. 틀림없이 엄마는 화를 내실 것이고,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일이 커지고서야 털어놓고는 더 크게 혼이 나곤 했다. 엄마도 내가 화를 낼 것이란 사실을 알고 계셨겠지. 엄마의 상태가 심각할수록 내가 더 많이 화낼 것이라는 사실도. 나도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보니, 그것은 미안함과 나 자신에 대한 후회와 책망이었다. 마치 병원에 한번 오지도 않던 보호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의사의 멱살을 잡으며 화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이가 열이 오르기 시작하면 쌀쌀한데 밖에 데리고 나간 것이, 마스크를 챙기지 않은 것이,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히지 않은 것이 화가났다. 어젯밤에 감기기운이 있었는데,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고 돌아오면서 해열제 하나 챙겨오지 않은 나 자신의 무심함에 화가 났다. 나 때문에 아프지 않을 수도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었던 아픔을 아이가 겪는 것이 미안했다. 


엄마는 열흘 전에 임플란트 시술을 받으셨다. 그것도 한꺼번에 3개씩이나. 평소 엄마는 무슨 약이든 반만 써도 효과가 있거나 부작용이 있었다. 수술이나 시술 후에는 어김없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아프고 더 고생을 했다. 그 예민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내가 엄마가 받으실 거라는 임플란트 시술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냥 치과 치료를 받으시나보다 했다. 임플란트 시술 후에 며칠이나 출혈이 멈추질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아니 어떻게 그렇게 출혈이 오래 가냐고, 혹시 아스피린 안끊은 것 아니냐는 무책임한 소리만 했다. 이틀 전 임플란트 시술을 받은지 일주일이나 지났을 때 분명 엄마는 나에게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전했다.


“경아, 근데 이상하다. 왜 갈수록 마취가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 들지.”


“임플란트를 세개나 했으니까 좀 부었겠죠 뭐. 게다가 오랫동안 출혈도 있었으니 불편한 느낌이 몇 개월은 가지 않겠어요?”


그 때 왜 안면마비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 더 전에 시술 후 계속 출혈이 있다는데 왜 그냥 넘어갔을까. 엄마가 지혈을 위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세게 턱관절을 물고 있었을까를 생각했었어야 했다. 치과에 다녀오시라고 지혈을 하고 오시라고 했었어야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전에 평소 엄마의 체력과 컨디션에 임플란트를 한꺼번에 3개씩이나 하지 못하도록 했었어야 했다. 그보다 더 전에 엄마 혼자 임플란트 시술을 하러 가시지 못하도록 했었어야 했다. 내 환자들도 중요한 시술을 할 때는 다들 보호자와 함께 오지 않는가.


그날 밤 가까운 응급실에 빨리 가시라고 화를 내고, 응급실에 도착한 후에는 왜 그병원 의사들은 빨리 안봐주냐고 화를 내고, 처방받은 스테로이드를 왜 더 빨리 안드셨냐고 화를 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그냥 빨리 직접 다녀오라고 했다. 다음날 병원 일을 대충 정리하고 엄마집으로 출발했다. 엄마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엄마는 백숙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무표정하던 엄마의 얼굴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엄마가 내 앞에 차려주신 백숙을 보니 목이 메었다.


“엄마는 저녁 드셨어요? 엄마도 드세요.”


엄마랑 같이 백숙을 먹기 시작했다. 결국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움직이지 않는 왼쪽 입술 때문에 의도치 않게 오른쪽 입술이 더 많이 밀려올라갔다. 스스로 감기지 않는 눈과 움직이지 않는 입술 때문에 말을 하거나 음식을 잘 드실 수가 없었다. 엄마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엄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같이 저희 병원에 가요.”


어제 응급실에 다녀오셨던 대학병원에 다음날 진료 예약이 되어 있었지만, 엄마의 얼굴을 보고 나니 그대로 혼자 내려올 수는 없었다. 평소같으면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셨을 엄마가 바로 짐을 챙기셨다. 신기하게도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에 타고 보니 엄마의 얼굴은 벌써부터 호전되어 있었다. 나를 따라 나서니 마음이 그렇게 편하실 수가 없다고 했다. 경직되었던 얼굴이 한차례 풀어진 것을 보니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릴 적 나에게 엄마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시집을 온 엄마는 20대 초반에 우리 삼남매를 낳으셨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때 방송통신대학을 마치셨고, 내가 중학생때 석사학위를 받으셨다. 추운 겨울날 자가다 눈을 뜨면 두꺼운 외투를 뒤집어쓰고 스텐드 불빛 밑에서 공부를 하는 엄마가 있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엄마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식탁 위에는 갓 튀겨낸 수제도너츠가 있었다. 내 기억에 엄마는 항상 배우고 가르치고 뭔가를 열심히 하고 계셨다. 엄마와 나 사이에 깊은 골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내가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부터였다. 내 전공도서를 보면서 자신은 가지지 못한 대학시절과 자유로운 청년시절을 부러워하는 엄마가 미숙하고 철없어 보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엄마가 답답했고,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원망했다. 사람들은 늘 엄마를 만나면 소녀같으시다며 감탄했다. 언젠가부터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엄마가 엄마다워야지 소녀 같으면 어떡하나. 나는 소녀 같은 엄마가 엄마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소녀같던 엄마의 얼굴에도 주름이 생기고, 나는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다. 엄마는 그때 소녀같았던 것이 아니라 소녀였던 것이다. 엄마는 지금 내 나이에 스무 살 딸이 있었다. 지금 우리 딸이 대학생이고 나와 함께 집을 나선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나더러 자매인 줄 알았다고 말하겠지. 이제와서 스무 살 그때의 내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를 돌아보면, 그 어린 나이에 우리 셋을 훌륭히 키우신 엄마가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지금 여전히 미숙하고 철이 없는 나 자신을보면, 그 시절 내가 엄마에게 요구했던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엄마가 엄마답지 못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어른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다행히 엄마의 안면마비는 뇌졸중이 아니고 벨마비였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을때 잘 발생하고, 대부분 후유증 없이 회복된다고 했다. 엄마의 얼굴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어느날 밤 아홉살 난 첫째가 물었다.


“엄마, 내가 70살 때 엄마는 101살이네.”


“야아, 그땐 엄마가 없지.”


딸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애?”


“너가 70살까지 엄마가 어떻게 살아있겠어.”


딸애는 울기 시작했다. 그땐 과학이 발전해서 120살까지 살 수 있을거라는 둥, 앞으로 집에 일찍와서 운동을 10번씩 하라는 둥, 자기가 운동을 가르쳐주겠다는 둥, 엄마 아프면 안된다고 한참을 훌쩍거리다 잠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70살이 되기까지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더 짧은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밖에 없겠구나. 훌쩍거리는 딸아이 옆에 누운 내 콧잔등도 시큰해졌다.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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