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때밀이
- 연도2011년
- 수상은상
- 이름김원석
- 소속강북삼성병원 피부과
천포창이란 병이 있다. 의사들에게도 생소한 희귀병인데, 실상 “창”이란 이름이 붙은 이 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조상들이 알고 있던 병이다.
우리가 잘아는 나병(한센병)을 대풍창이라 불렀고, 천연두를 풍창이라 불렀다 하는데 “창”이 붙은 질환은 물집과 진물이 나는 것이 특징이라 예로부터 고약한 병으로 알려졌던 게 틀림없다. 천포창의 천이 한자 하늘 “天”을 쓰는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하늘이 내린 벌이란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실상 옛 사람들은 천포창 환자의 전신이 녹아 내리는 것 같은 피부와 수포, 진물을 보고 쉽게 천형으로 생각했으리라….
피부과 전공의를 처음 시작한 해였다.
힘든 과를 전공하는 친구에 비해 조금은 여유로운 삶을 보내는 나에게 한 명의 입원환자가 배정되었다. 77세, 여성, 추정진단 천포창, 교수님과 도는 첫 회진때 병변을 열어 보이려는 내게 “선상 아이고 더러운데… 만지면 어째, 옮을텐데…”하며 마치 큰 죄를 지은 듯 움추려 드는 할머니와 피부병 중에 치사율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병이니 애 좀 써야겠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겹치며, 그간 어째 내공(?)이 좋아 별 큰 어려움 없이 1년차를 보낸 것이 약발이 다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내가 하는 일은 수시로 병변을 소독하는 것인데 처음엔 하나하나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습포를 하다가 언제부터는 아예 소독약을 세숫대야에 받아놓고 큰 거즈로 목욕을 시키듯이 소독을 하게 되었다. 온몸에 있는 물집을 터트리고 딱지도 제거해주다 보면 몸이 땀 벅벅이 됐고 시간도 참 많이 걸렸다. 처음엔 옷을 벗는 부끄럼과 내가 힘쓰는 것에 대한 미안함에 대강 하시라던 할머니도 어느덧 병동 간호사들에게 선생님 오실라면 멀었나며, 내가 오기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무심코 건넨 농담 한마디 “할머니 나 전생에 때밀이였나 봅니다. 이렇게 할머니 씻겨주는 게 적성에 맞는 걸 보니까요, 하하하”, “선상, 때밀이라니 의사선상이 전생에 그런 안 좋은 일을 했을 리 없어, 말도 안되지, 그런 소리 말어…” 가벼운 농담에 좀 과하게 할머니가 반응한다 싶었는데도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소독하러 갈 때마다 크게 “할머니 나 때밀러 왔수다” 하고 소리치며 병실을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할머니의 피부는 많이 좋아져 퇴원을 앞두게 되었고 퇴원 전날 보호자인 아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겠다며주치의인 나를 찾았다. 말쑥한 중년신사인 아들은 그간 바빠서 자주 못 뵌 게 죄송하다며,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피부병이 걸린 것 같다며, 정말 어머니께 미안하다며 말을 꺼냈다
.
“제가 어릴 때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살기가 막막하여 목욕탕에서 때미는 일을 하며 저를 키우셨어요. 더러운 때를 맨날 만지고 몸에 묻고 했던 게 쌓여서 이렇게 이상한 피부병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병이 생기기 직전까지도 제가 그만 하시래도 소일하며 용돈을 버신다고 가끔 때 미는 일을 하셨어요. 선생님 앞으로 때 밀면 병에 안 좋으니 절대 일하지 못하게 단단히 당부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머리속이 땅하는 충격이 왔다. 평생 때를 밀며 사신 분에게 장난처럼 맨날 때밀러 왔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할머니는 맘이 안 좋았을까, 내가 정말 입방정을 떨었구나 하는 생각에 죄송함이 밀려왔다.
다음날 퇴원 전에 할머니에게 퇴원약과 집에서 주의할 것들을 설명해주곤 조심스럽게 말을 열었다.
“할머니, 정말 죄송해요. 목욕탕에서 일하셨다고 아드님께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놀리려는 거 아니었구요…. 그냥 제가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
할머니는 우물쭈물 말하는 나를 막아서며 “선생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가 여지껏 때밀이 하며 아들 하나 잘 키웠지만 항상 이런 일하는 것이 부끄럽고 남들 눈만 피하며 살았어요…. 그리고 때밀다가 피부병도 걸렸다고 생각했고요…. 근데 선상님이 매일 제 때를 밀어주고 이렇게 낫게 해주셨잖아요. 그리고 아무런 싫거나 부끄러운 거 없이 당당하게 때밀러 왔다고 하셔서 그런 일 하는 거 부끄러워했던 지가 참 바보 같았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론 내가 했던 일들이 하나도 안 부끄러울 거 같아서 선상님께 진짜 고마워요.” 그리고는 “이거 정말 고마워서 그러니 담배나 사 피세요.” 하며 내 손에 뭔가를 쥐어주고는 종종걸음으로 병동을 빠져 나가셨다.
그렇게 할머니가 가고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잘못했음에도 되려 칭찬을 받자니 얼떨떨 하고 부끄러웠다. 난 왜 때밀이란 말을 썼을 까? 아마도 그 속에는 뭔가 내가 하는 일을 비하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온갖 잡일에 시달이는 1년차,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소독일이 하기 싫었고 짜증나는 마음을 때밀이란 말에 함축하여 나를 스스로 비하하고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생각이 또 환자의 아픈 곳을 건드리게 하지 않았을까? 정신차려 손을 펴보니 꼬깃한 만원짜리 두장이 있었다. 이 또한 힘겹게 때를 밀며 버셨을 거란 생각에 맘이 울컥했다. 그 돈으로 담배를 사서 그 날 저녁 당직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
그 후로 17년 동안 나는 계속 이런 일을 한다. 그 동안 피부과는 미용을 다루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바뀌어 나를 보는 주변의 눈은 우아하고 화려한 생활과 나를 연관짓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본질이 때밀이라는 생각을 한다. 더럽고 아픈 피부를 제거해주는 사람이니까 그렇다. 하지만 17년 전과는 달리 나에게 때밀이란 말은 절대로 비하나 부끄러움을 가진 말이 아니다.
나를 통해 할머니가 때밀이 일을 한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했던 것처럼, 그 할머니를 통해서 나는 언제나 기꺼이 즐거운 때밀이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조만간 아버님을 모시고 목욕탕 가서 등을 시원하게 밀어 드려야겠다.
나는 즐거운 프로 때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