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아빼
- 연도2012년
- 수상금상
- 이름김대겸
- 소속효촌푸른의원
사람들은 그를 맹장염이라 부른다. 조금 더 그와 친한 사람은 충수염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부르는 명칭으로 누군가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알 수 있다. 그와 가장 친한 사람은 아빼라 부른다. 의사들이 습관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외과의사인 나도 그를 보면 아빼란 이름이 먼저 튀어나온다.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온 별칭이다. 언제부터 그에게 아빼란 별명이 붙었을까? 아마도 우리나라에 근대의학이 도입되면서 의학용어들도 따라 들어왔는가 보다. 충수염의 영어 이름인 아펜디사이티스(appendicitis)를 어느 일본인 의사가 간신히 읽어내기 시작한 것이 アッペ(아빼)이다. 앞머리의 appe를 따서 アッペ로 불렀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때 들어와 우리에게 그대로 남은 듯하다.
언뜻 들으면 ‘앞배’ 같기도, 어쩌면 ‘아파’ 같기도 하다. 맹장염이 걸리면 앞배가 아프기 마련이니 우리말과도 일치하는 절묘한 외래어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잔재가 거의 없어져 가고 있는 지금까지, 100년이 다 되도록 쓰이고 있다.?
은근 슬쩍 앞배라 바꿔서 불러본다. 그래도 부르다가 보면 듣는 이에 의해서 다시 아빼로 된다. 부르는 이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앞배인지 아빼인지 구별이 안 된다.
새내기 의사들의 머릿속엔 appe로, 옛 의사들에겐 アッペ로 각인된 이 병은 생각 없이 부르면 아빼이고 의도하고 부르면 앞배이다. 이름도 많고 탈도 많은 병이다.
그의 명성은 자자하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끔찍스럽게 아파하다가 병원에 실려가니 그는 아주 호들갑스런 병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앓고 지나니 흔한 병이다. 누구나 문병 한번 가본 적이 있거나 하다못해 와병기 한번쯤은 무용담처럼 들어본 적이 있을 터이니 환자들이 보기에는 쉬운 병이기도 하다. 그런 병을 놓치면 의사는 일순간에 돌팔이가 되고 만다.
그에게는 경험 많은 의사가 초보의사보다 더 만만하다. 초보의사는 환자의 앞배가 아프면 아빼를 쉽게 잡아내는데 경험 많은 의사는 앞뒤를 함께 생각하다보니 아빼를 잡아내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아는 게 많아져서이다. 아빼 주위로 세상을 넓혀 근처의 장腸이며 난소며 요로며 림프절로 탐색의 여행을 나간 의사는 아빼만의 세상을 놓치기 십상이다. 경험 많은 이에게는 앞배가 자꾸 뒷배가 되려고 한다.
섣부르게 그에 대한 말을 꺼내도 아니 된다. 내가 외과의사 10년 만에 비로소 개업을 한 그 무렵이었다.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배가 아프다고 왔다. 열도 있었고 처음에는 명치가 아프더니 점점 오른쪽 아래 앞배가 아파온다고 했다. 오른쪽 다리를 올리거나, 아픈 지점을 손으로 누르다가 떼어내면 순간적으로 더 아파했다. 진찰만으로는 영락없이 아빼였다. 그에 대한 말을 꺼내고 말았다.
“맹장염 같은데요.”
나는 아주머니에게 정밀 검사를 받게 하려고 큰 병원 응급실로 보냈다. 피검사를 했고 CT까지 찍었다. 그래서 환자가 들인 수 십 만원의 진료비. 하지만 검사결과로 확진된 병명은 맹장염이 아닌 단순한 장염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나를 동네에서 돌팔이로 소문냈다. 맹장염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 의사라고……. 나에게도 뼈아픈 아빼이다.
그는 속셈을 잘 들어내지 않는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그가 사는 곳은 앞배이지만 반드시 그 부위가 우선 아픈 것은 아니다. 앞배가 아픈 대신 가끔은 감기 몸살의 증상으로, 어떨 때는 장염 같은 설사로만 환자를 병원에 가게 만든다. 심술을 부리는 듯하다. 그는 오진을 하게 만들어 의사를 곤란에 빠트린다.
그뿐이겠는가?
곤란이야 그를 앓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소풍날만 기다려온 초롱초롱 눈망울에 실망을 주고, 시험을 바로 앞둔 이의 책을 덮게 만들고, 몇 날 며칠을 준비해온 약속을 그르치게 만들고, 결근으로 바쁜 일터에 시름을 안기고, 얼마 전에는 유명가수를 콘서트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그는 늘 밉살맞은 천덕꾸러기였다.
오른쪽 앞배 안쪽에 숨어서 작게는 엄지손가락만하게, 크게는 주먹만큼 커져 곪아 있는 존재. 그런 염증이 생겨 아빼가 되기 전에는 아주 몸집이 작고 온순한 장기臟器로서 존재했다. ‘충수돌기’였다.
충수는 심장처럼 뜨겁지도, 간장처럼 양분으로 차있지도 않았고, 위장처럼 꾸준히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작디작은 눈썹은 하다못해 흐르는 빗물이라도 막을 수 있지만 충수는 특별히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몸에서 막연히 세균 청소 같은 잡일이라도 시켜보려 했지만 사실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그런 충수는 입에서 항문까지 이어져 있는 다른 장腸들과는 달리 홀로 떨어져 대장에 붙어 있었다. 음식물의 마지막 잔재마저 그곳을 거쳐 지나지 않고 외면하였다. 아무도 충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충수는 배에서 제일 구석진 곳, 대장의 끄트머리, 골방 끝 근린에서 하는 일 없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충수는 심한 난동을 부리고 소란을 피웠다. 세균의 침범을 받고 농익은 아빼가 되어 터진 것이다. 그의 일생은 수술실로 끌려가 떼어짐으로 끝이 났다.
비록 소외 속에서, 존재의 이유도 모르고, 하는 일도, 해야 할 일도 뚜렷이 없었지만 그저 소동만 부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일생을 인간의 몸 안에서 잘 지낼 수 있었을 걸…….
아무도 충수가 왜 태어났는지 몰랐다. 왜 그렇게 사라져야 했는지도 몰랐다. 신조차 실수를 한 것인가? 가장 완벽하다는 창조물 인간을 만들며 신은 작은 부조리를 남긴 것인가?
문득 아빼가 되어 사라진 충수는 ‘이방인’ 뫼르소를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았고 부조리하게 사라진 ‘이방인’ 뫼르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그는 오히려 행복해했다. 어쩌면 떨어져나가는 충수도 오히려 행복했을까?
아내가 아빼에 걸렸다. 의사의 부인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말썽부린 충수를 가차 없이 떼어버렸다. 엄살 많은 아내는 수술 후 꼼짝하지 않고 누워 아파했지만 한편으론 시원해했다. 후련해하는 아내의 몸에서 가장 아파하는 것은 충수가 떨어져 나간 장腸이었다. 그토록 충수를 소외시켰던 장腸이건만 충수가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아파했다. 하지만 아픈 것도 잠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충수가 없다는 사실을 곧 잊고 말 것이다.
오늘도 한 젊은 환자가 앞배가 아프다고 들어선다. 충수는 잘 있는지 살펴본다. 또 아빼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진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