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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이 선생님을 추모하며

  • 연도2012년
  • 수상동상
  • 이름최윤진
  • 소속복지피부과의원


7년 전 종양내과 인턴을 돌 때의 일이다. 그 때 나는 이제 인턴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되는 새내기 의사였다. 인턴을 시작하고 한두 달 정도는 일이 낯설어 처음에는 다만 실수하지 않는 데에만 온 정신을 기울였지만, 3개월이 되니까 그것도 경험이라고 어느 정도 시야가 넓어지면서 환자들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 때 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사람은 지금은 돌아가신 이 선생님이다.

 

이 선생님은 당시 33세로 위암 4기 환자였다. 젊은 사람에서 위암은 매우 빠르게 진행한다. 이 선생님은 단순한 소화불량으로 내과 병원을 찾았다가 암세포를 발견하였고 단 6개월 만에 위암 4기로 진행된 케이스였다. 수술 한 번 못 해보고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는데, 항암치료가 처음에는 조금 듣는 듯하다가 곧 내성을 보이면서 급격히 악화되었다. 악성 종양은 신체 내부뿐만 아니라 불운하게도 피부 표면으로도 심하게 번져서, 내가 그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백여 개의 악성 종양이 온통 얼굴과 몸통에 돋아나 있었다.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설명하자면, 혹부리 영감 이야기에 나오는 혹부리 영감의 혹과 같은 것들이 작은 형태로 얼굴에 수십 개씩 돋아나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인턴으로서 나의 주된 일은 괴사와 출혈 소견을 보이는 이 혹들을 드레싱하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피부과 의사로서 잔뼈가 굵어져 웬만한 피부 소견을 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지만, 당시에만 해도 갓 의사가 된 터라 그 피부 병변을 마주하는 것으로도 상당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으니 환자는 말해 무엇하랴.


이 선생님은 몇 개월째 입원 중인 사람치고는 병실에 짐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다만 항상 침대 머리맡에 사진이 한 장 붙어있었다. 공원의 잔디밭에서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두 명이 분홍 풍선을 하나씩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이미 악액질 단계에 들어가 얼굴에 광대뼈만 보일 정도로 수척해진 그와는 커다란 대조를 이루어 더 슬펐다. 나는 병실에서 상처를 소독하며 매일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는데,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들의 사진이 그가 단지 말기 암 환자일 뿐만 아니라 어린 두 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만들어 자꾸만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나는 그에게 간절히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에 대한 나의 치기 어린 위로가 그에게 애먼 상처가 될까 싶어 보름이 넘는 시간을 그와 마주치면서도 결국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는 묵묵히 드레싱을 가는 나의 손길과 병실의 막힌 공간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공허한 눈빛뿐이었다.


그와 말문을 트게 된 것은 사소한 계기였다. 교수님의 오후 회진에 앞서 환자 상태를 체크하고 있는데, 마침 그의 병실에 들어갔을 때 TV에서 각 세대별로 가장 흔한 이름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내 딸 이름이 저기 나오네.”


그가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그가 이렇게 길게 얘기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의외로 낮은 목소리였고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어색한 침묵이 깨진 것이 반가워 나는 얼른 말을 붙였다.


“따님들 성함이 뭐에요?”


“서연이하고 연서라요. 앞뒤로 뒤집어서 지었는데. 재밌지요?”


그는 마치 정말로 재미있는 얘기를 하듯이 말했다.


“이서연이랑 이연서라, 이름 잘 지으셨네요. 그리고 사진을 항상 봤는데 따님들이 참 예뻐요.”



그와 나는 그 때부터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침묵뿐이었던 드레싱 시간에도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갔다. 그가 학교 선생님인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이 선생님은 고등학교에서 체육을 맡고 있다고 했다.


“항상 마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우습죠?”


낮고 공허한 웃음이 병실에 조그맣게 울렸다.


종양내과에는 주말에는 환자가 적다. 주중에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대부분 주말에는 퇴원하기 때문이다. 환자도 없던 차에 나는 그 즈음 꽤 친해졌던 이 선생님 병실을 찾아 그간 궁금하게 생각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때마침 그의 아내도 주말이라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따님들 많이 보고 싶으시죠?”


“억수로 보고 싶어 죽겠심다. 얼마 전에 첫째 애가 생일도 지났는데.”


“근데 따님들을 한 번도 병원에서 못 본 것 같아요. 병원에 놀러 오면 제가 맛있는 것도 사주고 하면 좋을 텐데.”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그게 마 다 사정이 있어서……. 애들은 내가 암 걸린 줄 몰라예.”


그가 말을 흐렸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어쩔 줄 몰랐다.



“최 선생님은 아직 결혼 안했지예? 얼라도 없을 테고……. 그럼 내 심정 이해하기 힘들 깁니다.”


당황한 나의 표정을 본 그가 말했다.


실제로 당시 나는 그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병에 걸리고 쇠약해진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더라도, 그래도 아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 하지 않을까? 서서히 쇠약해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아이들의 고통이 크다 할 지라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그보다 더 크지 않을까?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고 가끔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꺼내봤지만 그는 그냥 고개만 조용히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9개월째 여전히 딸들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채로 그의 생명은 조금씩 저물어갔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는 점점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진통제 중 그의 고통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은 모르핀 밖에 없었다. 모르핀을 투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뿐이기에 나는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달려가 그의 날선 통증과 마주해야 했다. 갈수록 모르핀의 양은 증가되었고, 그는 식은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누가 보아도 그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평온했던 마지막 밤 중 어느 순간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임박한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선생님은 때이른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고, 죽음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곤 했다. 그러던 중 나는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선생님, 그래도 딸들한테 작별 인사를 하고 가야 하지 않나요?”


“내가 책에서 봤는데 그 나이 때 애들은 아직 죽는 게 뭔지도 모른다 카더랍니다. 그라고 내가 거울을 봐도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무서운데 이런 거 보여줘서 뭐할라구요?”


그러면서 침상 옆 서랍 속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서 내게 건넸다. 사진 속에는 지금의 그와는 전혀 다른 건장한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딱 1년 전인데……. 우습죠? 저는 그래도 애들이 요래 나를 기억해주면 좋겠네요. 지금 같은 모습은 싫고……. 지금 이거 보면 얼라들은 절대 못 까먹어요. 무지하게 보고 싶긴 한데, 이제 쪼매만 참으면 되요.”


이 선생님은 내가 응급실로 배치가 바뀐 사흘 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인공 호흡기를 달고 힘겹게 버티다가 이틀 후 사망했다. 장례식은 응급실에서 조금 떨어진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응급실 밤샘 근무를 마친 나는 먼 발치에서 겨우 발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조그만 두 아이는 검정 옷을 입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머니의 치마자락에 꼭 붙어 있었다.


이제야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그의 어린 딸들을 나는 멀리서 한참 바라보았다. 흐느끼는 어머니를 붙들고 졸린 표정으로 겨우 서 있는 어린 아이들이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들을 위해 보여준 희생을 언젠가 이해하는 날이 올지를 생각해 보았다. 10년은 걸리리라,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내가 대신 기억해서 이야기해주리라고 이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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