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역지사지
- 연도2016년
- 수상동상
- 이름홍영선
- 소속가톨릭성모병원 종양내과
1997년 겨울, 나는 여의도 소재의 대학병원에 종양내과를 신설하면서 과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병원은 한국 최초로 골수이식에 성공한 병원이어서인지, 전국에서 혈액암 환자가 몰려들었다. 나는 고형 암의 항암치료도 했지만 골수이식 센터의 일원으로 악성 림프종의 항암치료 및 골수이식을 전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오는 환자가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병원 응급실은 혈액암 환자로 만원이었다. 상태가 급한데 입원실이 나지 않는 경우 어쩔 수 없이 응급실에서 항암치료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응급실 당직 의사나 간호사들의 불만이 많았고 환자들 역시 많이 힘들어했다.
어느 날 응급실 회진을 하는 중이었다. 보호자 한분이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암이 뼈로 재발하는 바람에 통증이 심해 응급실로 왔던 환자의 부인이었다.
“왜 표정이 그러세요? 안 좋은 일이 있으셨어요?”
“어제 밤 인턴 선생님이 얼마나 불친절했는지 몰라요. 환자는 아파하는데 통증 조절도 해주지 않고… 와서 봐주지도 않고…”
“그래요? 아니, 그런 나쁜 의사가 있나? 아픈 환자를 방치하다니.”
정말 화가 났다. 온갖 불평을 쏟아내는 보호자를 달랬다. 모든 의사들이 말기환자의 통증조절을 잘 해주기를 강조하고 있었는데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요즘 젊은 의사들은 왜 그러나 몰라. 저렇게 아파하는 환자의 통증조절을 잘해줘야지… 거기다가 불친절하게 굴면 어떻게 해. 자기 가족이 아파도 그렇게 했겠어?… 누군지 찾아서 혼을 내야 되겠어.’ 하고 혼자 분통을 터뜨렸다. 간호사들과 다른 의사들만 있는 자리였다.
응급실 회진을 마치고 떠나려는 순간 한 젊은 의사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간호사의 연락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온 것 같았다.
“제가 어제 밤 당직 인턴입니다.”
“어… 자네야?”
“왜 아픈 환자 통증조절을 안 해 줬나? 더구나 아주 불친절 했다던데….”
“저는 불친절하게 행동한 적 없습니다. 마약성진통제라고 가족들이 사용을 거부해서 설득하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다른 진통제를 썼지만 잘 듣지 않았습니다. 환자가 많이 아파해서 가족들이 기분이 안 좋았을 뿐입니다.”
인턴은 차분하고 당당했다. 그 순간 젊은 인턴의 얼굴에, 20년 전 내 얼굴이 겹쳐졌다.
군 복무를 마치고 인턴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응급실장 방으로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직감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이 응급실 인턴을 부르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응급실 상주 근무를 했다. 밤에는 전체 인턴들이 돌아가면서 5일에 한 번 정도 응급실 당직을 했다. 그 병원 응급실은 환자 수가 많고 대부분 증세가 심한 환자들이라서 햇병아리 의사인 인턴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지옥’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홍 선생이 어제 밤 응급실 당직이었나?”
응급실장 교수님이 물었다. 늘 아랫사람들을 인자하게 대하셔서 내심 존경하던 교수님이었다.
“네. 김 선생하고 둘이 당직을 섰습니다.”
“환자가 많았다며?”
“네. 새벽까지 잠시 앉아 있을 틈도 없었습니다.”
“어제 환자하고 무슨 일이 있었어?”
순간, 전날 밤, 얼굴에 찰과상을 입고 왔던 환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굵어지더니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하드락 밴드의 타악기 소리같이 규칙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응급환자는 계속 몰려들었다. 인턴 둘이서 뺑뺑이를 돌며 환자를 보는데도 쌓여 있던 차트는 점점 늘어만 갔다. 서울 시내의 응급환자는 모두 그 병원 응급실로 모인 것 같았다.
자정 무렵, 50대 초반의 환자가 얼굴에 찰과상을 입었다고 한다. 술기운이 역력했다. 걷다가 어느 건물 모서리에 긁힌 상처라고 했다. 성형외과로 바로 전화했다. 자다가 깬 레지던트가 흔쾌히 내려오겠다고 했다. 우선 상처 소독을 하고 환자에게 기다리시라고 설명했다. 다른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그 환자가 와서, 거울을 보니 꿰매야 할 상처는 아닌 것 같아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성형외과 레지던트에게 연락을 했으니 만나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술이 취했으니 조심해서 가라고 인사했다.
한 시간쯤 뛰어다니면서 환자를 봤는데도 차트는 전보다 더 높이 쌓였다. 그런데 갑자기 문 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환자가 문 앞에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왜 자기를 치료 안 해주냐는 것이었다. 아까의 상황을 차분히 설명하니 이번에는 막무가내로 진료비를 돌려달라고 했다. 술에 취해 꼬부라진 혀로 욕설까지 퍼부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오죽하면 옆 침대의 환자 보호자들이 자신들이 나중에 필요하면 증언하겠다고 거들고 나섰다. 그 환자는 자신의 동생이 모 대학병원의 내과 교수인데, 동생한테 얘기해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남기고 사라졌다.
“진료부장님이 홍 선생한테 시말서를 받아오래.”
진료부장 교수님은 당시 텔레비전에도 자주 출현했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환자로 외래가 인산인해를 이루는 분이었다. 대학에서 영향력이 커서 나 같은 인턴 하나쯤 혼내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 시말서를 쓸 수는 없었다. 내 의사로서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 하지만 난 어금니를 깨물었다.
“전 시말서 못쓰겠습니다. 그럴 만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응급실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그럼 경위서라도 써서 진료부장님께 가져가보라고 했다.
진료부장은 교수실에 계시지 않았고 전화 연결도 되지 않았다. 점심때쯤 응급실을 통해 지나가는 길에 마주쳤다. 나는 쫓아가서 인사를 하고 경위서를 내밀었다.
“제가 어젯밤 당직 인턴입니다.”
“자네야? 응급실 당직 인턴이 왜 환자를 안보고 방에 가서 잤나? 왜 응급 환자를 치료도 안 해주고 쫓아냈나?”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최소한 어제 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줄 것을 기대했으나 이미 나를 나쁜 인턴으로 결론내린 후였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든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교수님은 인턴 때 응급실 당직을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 속에서만 폭발하고 말았다.
“자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휙 지나가 버렸다. 난 옆에 있던 의자에 털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전날 밤 응급실 당직을 했던 원무과 직원과 경비 아저씨, 그리고 응급실 간호사가 한사람씩 진료부장 방으로 불려갔다. 내가 당직 중에 환자를 안보고 방에 올라가서 잔 사실이 있는지와 응급환자를 안보고 내쫓았는지 여부를 확인할 목적이었다. 아무도 그렇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응급실 간호사는 한 술 더 떴다고 했다.
‘진료부장님께서 응급실 인턴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한 번 와서 보신 적이나 있습니까? 어떻게 남의 말만 믿고 자기 밑의 의사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몰아버리십니까?’
나중에 그런 소문을 들었을 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진료부장님은 끝까지 나를 부르지 않았고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이 되었다.
그날 여의도 병원의 응급실에서, 나는 과거의 그 진료부장이었고, 인턴 선생은 과거의 나였다. 그 젊은 인턴과 과거 인턴 시절의 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대해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과거의 진료부장님도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에 그렇게 하셨으리라. 역지사지! 그날 인턴과의 만남은 자만에 빠져 있던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라는 뜻 깊은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